열화재에서의 강의는 재미없고 고리타분했다.
'선비문화체험'이나 '유교사상이나 유교' 같은 그런 높은 정신의 깊이를 가늠하고 엿보고 애써 배우기에는 내 마음의 곳간이라는 것이 너무 횡댕그레하게 비어있는 까닭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 아무렇게나 쉽고 적당히, 고민하지 않고도 그냥저냥 살아온 날들이 너무 하찮고 보잘 것 없어 속으로 찔끔 본색이 드러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열화재(悅和齊)에서 맞는 저녁에는 가는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바뀐 잠자리 탓인지 마음만 허둥거리던 설레임 탓인지 단잠들지 못하고 새벽녘에 깨었다. 초저녁에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가 굵어 지면서 모처럼 시름겹거나 추억도 아닌 것이 그리움처럼 빗소리가 깊었다.
 새벽 세 시에 날 깨우고는 오래도록 찰박거리던 빗소리.
 함께 잠든 두 사람의 숨소리 조차도 적막에 깃든듯 떠내려가는데
 세 시에 시작하여 네 시를 지나 다섯 시에 이르러서도 내 머리밭은 흥건한 빗소리로 젖어 들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안부없는 짝사랑 같은 혹 그런 화답없는 메아리 같던 옛일이 떠올랐다. 처마끝 빗줄기를 그으며 서서 문득 떠올려보던 유년의 꿈이나 손가락 걸어 다짐하던 희미한 옛 맹세 같은 것을 다 기억했다. 내 진작 불혹도 넘어 지천명을 지난 유월 어느 한갖진 잠자리에서 타관을 떠도는 나그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아, 그런 잠 안오는 긴 긴 밤에 추억을 되새김질 해보는 유월의 어느 밤에 옛사람 유정지(劉廷之)의 시는 왜 그리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랴!

낙양성 동쪽에 핀 복사꽃 오얏꽃들아 落陽城東桃李花
바람결에 날려 뉘집에 떨어지는가 飛來飛去落誰家
꽃같은 여인들은 제 얼굴 그럴까봐 落陽女兒惜顔色
지는 꽃 슬퍼하며 긴 한숨 쉬누나 行蓬落花長歎息
금년에 지는 꽃과 시드는 얼굴이여 今年花落顔色改
내년에 피는 꽃을 어찌 본단 말인가 明年花開復誰在
아, 송백도 찍혀서 장작이 되고 巳見松栢0爲薪
뽕나무밭도 변해 푸른 바다된다는데 更聞桑田變成海
옛 사람은 기어이 낙양성 못 돌아오고 古人無復落城東
오늘 산 사람만이 꽃바람 쐬는가 今人還對落花風
해마다 해마다 꽃은 이어 피건만 年年歲歲花相似
해마다 해마다 보는 사람 다르구나 歲歲年年人不同

 새벽에 배운 퇴계선생의 건강법이라는 활인심방(活人心方)도 좋았지만 열화제의 부페식 식사도 좋았다. 모르긴 해도 퇴계집안의 사람이라던 주인 아주머니의 영남지방 사대부가의 음식맛이 감칠맛있게 입에 맞았다. 콩을 발효시킨 집장이나 안동매실로 만든 매실절임이나 국화 화채나 대구포로 만든 술국이 지난 밤 술자리 취기를 가시게 하기에 족했다.

 국학진흥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지어진 한국국학진흥원에서의 강의는 자다 깨다 가수면 상태에서 이루어졌는데 아무렴 어떠하랴. 조상들의 지혜와 지식 뿐 아니라 학문적 열정을 몰래 엿보고 흠모하는 마음을 낸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애써 자위했다.
 강의후에는 곧장 전시실로 향했는데 사람의 길, 대동의 꿈 '유교박물관' 개관이 의미하는 바 그 깊은 뜻에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열악한 조건 아래 민간에 흩어진 국학자료가 잘 보존된 듯해 고맙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국학자료 기탁 현황을 보면서 생각했다.
주제별, 문중별, 지역별 전시를 통해 선조들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재조명할 수 있는 터전과 노력을 엿보여 줘 그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맙던지 모르겠다.

 달성 도동서원에서 기탁했다는 제례용구인 희준(犧樽)과 용작(龍芍)을 보는 마음은 새삼 스러웠다. 일찌기 분청이나 백자로 된 것들은 본 적이 있지만 고식의 제대로 된 유기 제품은 못보았기 때문이다. 함께 간 일행 한 분은 문화재 칭호를 가진 사람이 만든 유기도 나쁜 구리와 상납이라 불리는 주석을 써 오래되면 녹이 슨다고 했지만 옛 도동서원의 제구는 제대로 된 술항아리와 국자였던 것이다.
 유교박물관 직원의 설명은 분명하고 자세하게 이어졌는데 그 설명을 들으랴 몇 컷 찍으랴 내 몸놀림은 분주하기만 했다. 원컨데 목판 10만장 수집운동을 벌이고 있는 국학진흥원의 목판 수장고인 '장판각'을 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일반 전시실과 특별 전시실을 거쳐 상설전시실을 나서다가 나는 그냥 스쳐 지나쳤음직한데 우연히 '梅心舍'라는 현판을 보았다. 전시실을 나오다 다시 발길을 돌려 유심히 살펴 보았는데 눈에 익은 추사의 글씨체였던 까닭이다.
 매화는 일찌기 도화(桃花)나 행화(杏花)라는 한자말 꽃 이름도 있지만 복숭아꽃, 살구꽃이라는 순수한 우리 말도 갖고 있다. 그러나 매화를 떠올리면 오동은 천년 늙어도 가락을 잃지 않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시가 떠오른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나는 예전에 골동품 가게를 지나다 매심(梅心)이라고 추사가 글씨를 쓴데다가 매화꽃 조차 그려 넣은 현판을 구해 갖고 있다. 나무 목변에 오른쪽 매양 매(每)글씨는 굳이 조금 크게 쓰면서 파격을 준 추사 김정희의 서체를 보면서 때로 진정 멋을 아는 옛 어른들의 풍류를 미루어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내 일박 이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원'의 선비문화 체험도 매화가 상징하는, 추워도 팔지 않는 선비가 지녀야 할 향기를 애써 구하고 지키고자 하는 가열한 몸짓이 아니었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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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9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가분아저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반가운 페이퍼입니다.^^
저도 얼마전 글벗들과 안동에 다녀왔어요. 유교박물관이 잘 갖춰져있더군요.
설명도 자세히 들었습니다. 퇴계종택과 도산서원도 다시 갔구요.
매화꽃이 그려진 현판, 아주 멋스럽습니다. 소장하시고 계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