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고려 시대 문인이었던 이규보의 시 「시벽」을 함께 읽어보려 합니다.
이 시는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덧 병이 되어버린 한 시인의 솔직하고도 유머 어린 자화상입니다.
시벽 - 이규보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고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
이제는 시 짓는 일 벗을 만하건만
어찌해서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에 귀뚜라미처럼 읊조리고
저녁엔 올빼미인 양 노래하네.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
아침저녁으로 몰래 따라다니며
한번 붙으면 잠시도 놓아 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깍아 내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니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살도 또한 남아 있지 않다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니
이 모양 참으로 우습건만
깜짝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 년 뒤에 남길 것도 없다네.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웃음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 본다.
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렸으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 해설 및 주제 분석
「시벽」은 말 그대로 시를 짓는 병에 대한 고백입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벽'은 고치기 어려운 버릇을 의미하는데 시인은 이 앞에 시를 붙입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사회적으로는 정점에 오른 인물이지만 그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시를 멈추지 못하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귀뚜라미, 올빼미 같은 비유는 시를 짓는 일이 의식처럼 반복되는 삶의 습관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시마라는 표현은 시가 기쁨인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집요한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심간을 깎아내고 진액이 빠질 만큼 시를 쥐어짜는 모습은 창작의 고통과 소모를 과장되게 묘사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냅니다.
이 시의 묘미는 자기연민이 아니라 자기풍자에 있습니다.
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삶을 좀먹는다는 사실조차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속에서 우리는 한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끝내 놓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 시가 주는 메시지
어떤 사람에게는 일이 아닌 운명처럼 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창작 자체가 매우 고통스럽고 비효율적이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것이 또 창작입니다.
좋아하는 일은 삶을 소모시키면서도 동시에 살아 있게 만드니깐요.
시인은 시를 통해 말합니다.
이 병은 고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고치지 않기로 한 병이라고.
■ 하나의 감상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약간의 씁쓸함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혹은 좋아하는 일을 쉽게 놓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시인의 고백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의미 없다고 투덜대면서도 결국 다시 손바닥을 부비며 혼자 읊조리는 그 모습이 어쩐지 우리 자신의 모습 같아서 말이죠.
이 시는 묻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왜 계속하고 있나요?
그리고 조용히 답하게 만듭니다.
그게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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