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저자 신경림
창비
2024-03-29
시 > 한국시
책 _김수영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 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단 한번, 영원히 _전동균
이제는 말해다오, 하늘로 몸을 감는 덩굴잎들아
파로호의 찌불들아
울어도 울어도 캄캄한 이 밤을
이 밤의 장막 넘어
잘린 말 대가리들이 쏟아지는 허공의 또다른 밤을
한때 여기에도 사람이 살았어, 단검처럼
옆구리를 찌르는 물결들, 숨 내뱉는 순간
얼어붙는 바람을 삼키는
바람의 입들, 끝내
울지 않는 새들아, 말해다오, 이 밤의 장막 넘어
잘린 말 대가리들을 싣고
트럭이 질주하는
사막, 안개바다, 처녀의 피,
그곳의 오직 하나인 밤을
물고기들이 강의 고통을 기억하듯, 우리가
우리의 죄를 껴안아야 하는
재의 수요일이 오기 전에, 내 얼굴을 찢고
기린의 혓바닥이 튀어나오기 전에
목계장터 _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려
민물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어라연 _김선우
강원도 정선
어라연 계곡 깊은 곳에
어머니 몸 씻는 소리 들리네
ㅡ자꾸 몸에 물이 들어야
숭스럽게스리 스무살모냥……
젖무덤에서 단풍잎을 훑어내시네
어라연 푸른 물에 점점홍점점홍
ㅡ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
어라연 깊은 물
구름꽃 상여 흘러가는
어라연에 나, 가지 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