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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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소설가가 되기 전부터 나는 그의 작품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번역해왔다. 피츠제럴드는 나의 출발점이자 일종의 문학적 영웅이다."


피츠제럴드가 활동했을 때, 후기에 발표한 단편소설 8편과 에세이 5편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편집하고 번역하였다.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았기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초조하고 불안했던 피츠제럴드, 그럼에도 쓰는 것을 놓지 않았던 그였다.

특히 후기에 발표했던 작품들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희망과 애정을 엿볼 수 있어 피츠제럴드의 팬인 하루키는 더 깊은 애정을 느꼈다고 한다.


저자, F. 스콧 피츠제럴드는 미국의 소설가이며 단편 작가이다.

1896년 9월 24일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자퇴 후, 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그중에서도 1920년대 화려하고도 향락적인 재즈 시대를 배경으로 무너져 가는 미국의 모습과 ‘로스트제너레이션’의 무절제와 환멸을 그린 작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등과 함께 20세기 초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작품과 생애,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된 인물이다. 1919년 장편소설 『낙원의 이쪽』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25년 4월, 피츠제럴드는 장편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완성했는데, 1920년대 대공황 이전 호황기를 누리던 미국의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전후의 공허와 환멸로부터 도피하고자 향락에 빠진 로스트제너레이션의 혼란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작품에서 청춘의 욕망과 절망이 절묘하게 묘사되고 있다. 세계적인 명작으로 연극,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고 있다.




어느 작가의 오후


잠에서 깼을 때 그는 지난 몇 주 사이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부정문으로 나타낼 수 있는 분명한 사실ㅡ그는 편찮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ㅡ이었다.


몸이 아프고 나서 모든 것이 느려진 듯하다.

진즉 나간 딸이 머물렀던 자리를 서성거리다 하녀가 만든 토스트와 오렌지주스, 홍차를 아침으로 들었다.

반가움이라고 없는 지루한 우편물들만 가득하다.

'소설 아이디어' 노트를 보던 중 파트타임 비서에게 전화가 왔다.

몸이 아파 고용했던 비서였다.

그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 썼던 글을 찢어버렸으니 오늘은 올 필요 없고 우편물, 청구서가 많이 와 있으니 내일 오후에나 오라고 일렀다.


그는 상의와 하의의 색상이 다른, 가장 좋아하는 정장을 입었다. 지난 6년 동안 정장을 단 두 벌 샀지만, 둘 다 최고급이었다. 상의 하나만 해도 가격이 110달러나 되었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가야 했기에ㅡ목적지 없이 어딘가로 가는 것은 좋지 않다ㅡ그는 단골 이발사가 사용할 연고 샴푸 튜브를 호주머니에 넣고, 루미놀이 든 작은 약병도 챙겼다.


젊은 시절 그는 참 호기로웠다.

허세 낭낭한 그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 교통 신호를 요령껏 무시하고 빠른 걸음으로 건너가는 젊은이들을 뒤로 한 채 모퉁이에 얌전히 서서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린다.


…… 여섯 살부터 서른 살까지의 복장은 형형색색으로 다채로웠다. 그들의 얼굴에는 계획도 갈등도 없었다. 그저 도발적인 동시에 평온한, 감미로운 미정 상태의 얼굴이었다. 문득 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난간을 붙잡으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딛어 호텔 이발소로 향했다.

이발할 목적으로 시내로 외출한 것이 몇 달만인지 모르겠다.

단골 이발소에 들어서니 익숙하고 좋은 냄새가 코를 찔러 기분을 좋게 만들었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이발해주었던 단골 이발사가 관절염으로 몸져누었다는 사실은 지난 날을 더 떠올리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하녀가 그를 맞아주었다.

딸은 아직 집으로 오지 않았다.

하녀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냐고 물으니 그가 말했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볼링을 치고, 맨 마운틴 딘과 어울려 논 다음 증기탕에서 마무리했지. 전보 온 거 없나?"

"없어요."


서재로 걸음을 옮기니 2천 권의 장서가 햇빛에 반짝였다.



망가지다 The Crack-Up


…… 그러니까 계속 뇌리를 맴돌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갖가지 안 좋은 일에 대한 원인으로 돌리며 탓해대고, 마음이 약해질 때면 친구들에게 얘기하게 되는 종류의 타격은 갑자기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다. 한편 이와는 다른 종류의, 내부에서 오는 타격이 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그것을 자각했을 때는 너무 늦어서 손쓸 도리가 없는, 그런 종류의 타격이다. 어느 면에서는 자신이 다시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되는, 그런 타격이다. 첫 번째 종류의 타격으로 인한 손상은 순식간에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 종류의 타격으로 인한 손상은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알아차리게 된다.


10년 전만 해도 인생이란 대체로 개인적인 문제였다. 나는 노력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과, 싸우는 것은 필요하다는 생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실패가 불가피하다는 확신과 그럼에도 '성공'하겠다는 결의 사이애서 균형을 유지해야 했고, 특히 과거의 성과가 주는 압박감과 미래의 고상한 의도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균형 있게 다루어야 했다.


"들어봐요! 세상은 오직 당신 눈에만 존재해요. 당신의 관념 속에 존재한다는 말이에요. 당신은 세상을 원하는 대로 크게 만들 수도 있고 작게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스스로 작고 하찮은 사람이 되려 하고 있어요. 있잖아요. 만약 나에게 균열이 생긴다면, 난 세상도 나와 함께 망가지게 만들어버릴 거예요. 들어봐요! 세상은 오직 당신의 인식을 통해서만 존재해요. 그러니 균열이 생긴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말하는 게 훨씬 나아요."


하루키가 몇 번이고 읽었을 정도로 애정하는 작품으로, 직접 번역하고 싶었지만 나이를 더 먹고 번역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소중히 품었다가 이번에 번역했다고 한다.

이 해설을 읽기 전에 작품을 먼저 봤기에 해설을 보며 흠칫했다.

하루키는 에세이를 쓸 때 '망가진 3부작'과 「나의 잃어버린 도시」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는데 나 또한 두 작품이 인상깊어 글쓰기 노트에 꼼꼼하게 요약해놓았기에 놀랐던 것이었다.

하루키가 말한다.

헤밍웨이에게 '여성스럽다'라고 비난받은 이 에세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여기에 숨은 단단함을 부디 맛보시길.



젊은 시절 누구보다 화려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조용하고 적적해진 삶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젤다의 신경쇠약, 가난한 형편 그리고 이제 막 날개를 달아 훨훨 나는 후배들에게 추월당하는 초조함까지 여러 요인들이 그의 불안함을 자극하고 또 자극했다.

그럼에도 펜을 놓지 않았다는 것, 그는 진정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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