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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데니스 존슨 외 지음, 파리 리뷰 엮음, 이주혜 옮김 / 다른 / 2021년 11월
평점 :
『하나, 책과 마주하다』
열다섯편의 단편소설, 단편소설의 정수이자 본보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작가의 독창적인 세계관과 글솜씨가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짤막하지만 이야기는 매우 깊은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책을 펼치는 순간 몰입도있게 빠져들 것이다.
저자, 데니스 존슨은 1949년 뮌헨에서 태어나 도쿄, 마닐라, 워싱턴 D.C.에서 자랐다. 아이오와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멘토인 레이먼드 카버를 만났다. 스무 살이던 1969년 첫 시집 『물개 사이에 선 남자The Man Among the Seals』를 출간하며 데뷔했다. 1983년 첫 소설 『천사Angel』를 발표해 평단의 찬사를 받은 존슨은 1992년 소설집 『예수의 아들Jesus’ Son』을 출간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발돋움했다.
저자, 조이 윌리엄스는 1944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다. 단편소설 「돌보기Taking Care」로 전미도서상 후보에 올랐다. 이 밖에도 장편소설 『은총의 상태State of Grace』, 단편소설 「도피Escapes」 등을 썼다. 삶에서 겪는 상실을 신비롭고 영적으로 다루는 글쓰기로 이름을 알렸다. 레아 단편소설상, 밀드레드 앤 해롤드 슈트라우스상 등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저자, 레이먼드 카버는 1938년 5월 25일 오리건 주 클래츠케이니에서 태어났으며 20세기 후반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1980년대에 미국 단편소설 르네상스를 주도한 인물로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의 대가' '체호프 정신을 계승한 작가'로 불리운다. 1979년에 구겐하임 기금의 수혜자로 선정되었으며, 1983년 밀드레드 앤 해럴드 스트로스 리빙 어워드를 수상하였다. 또한 1988년에는 전미 예술 문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하트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Ⅰ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술을 나눠주고 내가 자는 동안 운전한 세일즈맨…… 버번으로 가득한 체로키족의 차…… 폴크스바겐은 대학생이 모는 대마초 연기 덩어리일 뿐이었고……
그리고 미주리주 베서니에서 서쪽으로 빠져나온 한 남자를 들이받아 영원히 죽여버린 마셜타운 출신 어느 가족의 남자……
구성, 배경, 인물 설정, 작가의 설명을 최대한 생략하면서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암시하는 목소리를 찾아낸다. 조각난 목소리를 서사가 결핍된 이유이며, 그리하여 그 자체로 일종의 설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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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이야기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사고 순간순간이 남자가 바라보는 그 느낌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제목 그대로 히치하이킹 도중 난 자동차 사고였다.
히치하이킹을 해 어떤 차를 타게 되었고 '나'라는 인물은 아기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 가게 된다. 남편은 운전석, 부인은 조수석에 앉은 채로.
그렇게 가는 도중 폭풍우 속에서 사고가 나게 된다.
이야기는 굉장히 철저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끔찍함이 극으로 치닫다 이내 병원 장면으로 옮겨가는데 울컥울컥 피를 흘렸던 남자는 결국 죽게 된다.
몇 년이 흘러 시애틀 종합병원의 중독 치료센터에 들어갔을 때 한 번은 똑같은 방법을 택했다.
"이상한 소리나 목소리가 들리나요?" 의사가 물었다.
"도와주세요, 오, 제발, 아파요." 탈지면 상자가 소리를 질렀다.
……
"방이 왜 이렇게 하얗게 변했죠?" 내가 물었다.
아름다운 간호사가 내 피부를 만지고 있었다. "비타민 주사예요." 간호사가 말했고 바늘을 꽂았다.
비가 내렸다. 우리 위쪽으로 거대한 양치식물이 늘어졌다. 숲이 언덕 아래로 떠내려갔다. 개울물이 바위 사이로 세차게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당신, 어이없는 당신들, 당신은 내가 도와주길 바라지.
하지만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 남자가 약물로 인한 정신 이상에 빠져드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어떻게 그가 사건들을 그렇게 명확하게 쓸 수 있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당신, 어이없는 당신들, 당신은 내가 도와주길 바라지." '멍청한 놈'은 예수가 아니다. 그는 예수의 아들이고 이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는 천국의 통찰력이라는 은총을 입었지만, 여전히 지상의 지옥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첫 단편을 읽자마자 원서가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원서 그대로 읽어야만 더 이해가 빠르게 될 것만 같았다.
많지 않은 단어들로 내용들을 구성한 이 단편은 꽤나 심플하면서도 심오했다.
Ⅱ 하늘을 나는 양탄자
양탄자를 처음 본 건 다른 동네 뒤뜰에서였다. 위층 베란다에서 높다란 회색 장대까지 도르래 빨랫줄이 뻗어있는 2층 주택 모퉁이에 화사한 색깔이 나부꼈다. 그러더니 차고 뒤쪽에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양탄자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
그냥 밤색과 초록색이었다. 갈색에 가까운 밤색 바탕에 진한 녹색의 구불구불한 고리 무늬가 있었다. 양쪽 가장 자리에는 굵고 거친 술이 달렸다.
……
결국, 얼마나 능숙하게 무게중심을 바꾸는가의 문제였다. 양탄자 한가운데에서 조금 뒤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면 양탄자가 앞으로 갔고, 왼쪽으로 기울이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울이면 오른쪽으로 갔다. 손바닥을 아래로 오므린 채 팔을 양옆으로 들어 올리면 양탄자가 떠올랐고 팔을 아래로 살짝 내리면 양탄자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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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탄자를 따라 과거로 회기하는 것만 같다. 그것도 아주 세밀하게 말이다.
소년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 감정을 불러 일으키며 기억해본다.
예로서, 잃어버린 사랑을 느끼려면 아만다를 사랑했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그녀의 웃음,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 턱에 난 작은 흉터를 떠올려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억의 대상이 평범하고 진부해도 그 기억의 감정을 심오하게 하고 느껴지게 하고 사실이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정밀함과 축적이다.
극 중 화자는 양탄자를 따라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보았는데, 나에게는 '음악'이 양탄자와 같은 존재이다.
특정 음악들이 과거의 한 부분, 한 부분을 그대로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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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다섯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쉽게 넘어갈 것이란 생각을 하면 오산이다. 흐름을 잘 타지 않으면 줄거리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놓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세계관의 독특함을 한껏 느낄 수 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창성이 짧은 글에 잘 묻어나기 때문에 막상 읽다보면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흘러 넘친다.
아, 오랜만에 제대로 된 단편 하나 읽었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딸기우유빛의 바인더, 글쓰기 노트에 적어놨던 짤막한 소설들을 괜스레 꺼내보았다. 언젠가 나도 이 글을 책으로 낼 수 있을까.
아껴두었다가 읽고 싶은 그런 글이라, 소설을 한 번 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