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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
김학동 지음 / 일조각 / 1980년 8월
평점 :
절판
39. 김학동, 한국 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 일조각, 1981.
김학동(1935~ )은 1958년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해방 후 대학교육을 받은 1세대 한국현대문학 연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주로 실증적 자료 고증과 비교문학적 방법론의 도입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는 그의 비교문학적 연구의 일환으로, 한국시와 1920년대 초를 중심으로 프랑스 시(베를렌, 보들레르)의 이입과 영향, 1920~1930년대를 중심으로 한 하이네 시의 이입과 영향, 1945~1950년까지의 미국문화의 이입과 영향, 그리고 최남선, 김영랑, 김상용과 외국문학의 영향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초창기 백철, 김병철, 송욱 등의 연구를 계승하여 발전시켰다고 평가될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서 연구의 한계는 뚜렷하지만, 초기 한국문학 연구의 방향설정에의 고민, 당대의 사상적 전제들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자료이다. 일단 이 연구의 한계부터 지적하자면, 무엇보다 조선과 서구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김학동도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많은 경우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을 매개로 하여 서구문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대 많은 식민지 문학도들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일본글들을 읽고, 그 방향성 속에서 길항하며 서구문학을 수용했다. 따라서 그들의 서구문학 수용에 대해서 올바로 평가하기 위한 실증적 기초로서, 그들이 어떤 책을 보았고 그 책을 왜 보았는지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매개자로서의 일본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이는 근래 심원섭, 구인모, 최태원 등의 연구로 보완되고 있다.
두 번째로, 김학동은 “영향 및 차용원천에 있어서 그 유사성도 중요하지만” 차이성도 중요하다고 지적하며, 수신자 나라의 역사, 사회환경, 수신자의 개성 및 지적 수준 및 그 밖의 여러 가지 요인이 바로 국문학의 특질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이 글은 반복적으로 한국문학의 서구문학에 대한 수용을 “영향관계가 심층적인 차원까치 전개됐다기보다는 詩的發想法이나 詩語내지 이미지의 어느 한 局面의 영향에 머문 한계성을 노정”하고 있다는 것으로 귀결한다. 이러한 판단은 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은 분석되지 않고, “당시의 전신자의 입장에서 서 있었던 역자들의 어학능력이나 그것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판단력이 갖춰져 있지 않았던 한계성”만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즉, 여기서 왜 식민지 조선의 문학도들이 특정 작가나 작품을 수용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소거되어 있다. 왜 수용했는지를 밝히려고 하지 않으니, 논의는 “서구문학은 원래 A라는 맥락에서 a라는 의미인데, 조선에서는 b로 번역되고 수용되었으니 이는 어학능력이나 판단력 부족이다” 같은 식으로 귀결되고 만다. 이러한 판단에는 당대 가용 가능했던 조선어의 어휘나 식민지 검열제도와 같은 제도적 압력 등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어떤 표피적 수용이다. 잘못이해했다. 도착언어의 한계. 가용가능 자원.) 3가지.
이 글을 역사적 연구의 대상으로 놓는다고 할 때, 그럼 어떠한 생산적 관점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의 한계점이라고 지적했던 질문들을 이 글에도 적용해야 한다. 즉 왜 이 글은 “왜 식민지 조선의 문학도들이 특정 작가나 작품을 수용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이 글이 현재 가용 가능했던 조선어(한국어), 그리고 학문적 전통으로서의 자원은 어떠했는가? 어떠한 제도적 압력이 존재했는가? 했다면 어떻게 작용했는가?
1. 왜 이 글은 “왜 식민지 조선의 문학도들이 특정 작가나 작품을 수용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사실 이것이 김학동에게는 자명했기 때문일 수 있다. 서구문학은 발전된 것이고, 조선근대문학은 없거나 있더라도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당연히’ 서구문학을 수용 이입해야 했다. 이는 김학동의, 그리고 당대의 서구(문학)과 근대성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근대성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도 전에, 근대성은 보편적 가치로 이미 설정된다. 서구에서 발흥했다고 믿어지는 근대성이 과연 보편적인지, 이것이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그 근대성은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시간을 투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빨리 수입하여 근대성을 획득하는 것이 먼저이다.
한마디로 프랑스 象徵派詩와 詩論의 도입은 우리 近代詩史에서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 1920 년을 전후해서 출발하는 한국 근대시의 서구적 지향이 그 본질적 속성이라면, 그 시대 이와 함께 유입된 西歐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또는 어느 文藝思潮보다도 프랑스 象徵派詩의 영향이 컸었음은 否認못할 사실이다. (81)
이처럼, “1920년을 전후해서 출발하는 한국 근대시의 서구적 지향이 그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은 논증되지 않고 전제된다. 이는 “말할 것도 없”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 책이 1981년에 쓰여졌다는 것은, 박정희의 군부개발독재와 전두환의 쿠데타, 광주항쟁 직후라는 의미이다. 이 당시의 개발 이데올로기나 새마을 운동과 김학동 본인이 얼마나 친연성이 있는지는 더 탐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 글이 “왜 식민지 조선의 문학도들이 특정 작가나 작품을 수용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김학동에게는 자명하기 때문이고, 계속 서구(문학)의 우월성과 조선(문학)의 한계를 결론을 내리는 것 또한 이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연구의 담론적 효과는, 조선근대문학의 후진성을 파악하고, 당시의 문학에게 이를 넘어설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제대로 서구문학을 공부하고 파악하여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이글이 함축하고 있는 문학사적 교훈이고 당대 문학장에 보내는 전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계속 “이제까지 「懊惱의 舞蹈」의 연구는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모두가 皮相的인 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와 같이 선행연구들을 비판하거나 분석하지 않는 태도도 이해된다. 이 책 어느 곳에서도 선행연구가 비판되고 분석되지 않는다. 김병철 선생의 연구만 긍정적으로 언급될 뿐이고, 기존 연구들이 왜 피상적인지, 어떤 지점을 계승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서구 이론가, 특히 워렌과 같은 이들의 논의만이 본문에 길게 서술되며 이에 대해 반응하며 문제의식을 명료화한다. 물론 이는 당대 한국문학 연구의 ‘식민성/사대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이 글 저류에 있는 김학동의 학문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서구(문학)의 우월성과 조선(문학)의 한계라는 도식이 연구의 측면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2. 이 당시의 가용했던 학문적 자원은 어떠했는가? 당대 담론장은 어떠한 논의들이 있었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김학동의 글은 1981년에 출간되었지만, 1960년대에 이미 완성된 인식틀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듯, 1960~70년대 창비를 중심으로 제3세계 문학이나, 문지를 중심으로 구조주의가 소개되고, 루카치를 비롯 하우저 등의 문학사회학 등이 담론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내재적 발전론 영향 아래 김윤식 김현의 한국문학사(1973)가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김학동은 이들과 표면적으로는 전혀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影響硏究의 문제는 점차로 소외되고 있는 느낌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우리 近代文學의 경우, 이 방법으로 解決되지 않으면 안 될 側面도 없지 않다고 본다. 近代文學史의 再構에 있어서 영향연구는 필요불가결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本稿는 그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여 韓國近代詩의 解釋을 위한 기반을 影響과 源泉의 연구에서 찾아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크게 4 部로 구성되어 있다. 韓國近代詩에 미친 西歐詩의 영향문제를 다룬 것들로, 發信者와 受信者의 관점에서 고찰한 것이다· 모두가 移入를 근거로 추출한 영향요소로서, 이 局面의 해결이 없이는 한국근대시의 實相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 다루어진 試論들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근대시에 미친 서구시의 영향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한국근대시의 실상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전제는 확고부동하다. 따라서 다른 논의들과 전혀 대결할 필요가 없다.
물론 문학사에서 쟝르나 文藝思潮, 주계 및 형식의 이동변이가 이루어지는 요소로서는 전통적인 것도 있겠고, 이와 함께 외래적인 것도 있겠지만, 특히 우리 근대 문학의 경 우는 外來文學的영 향요소가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근대문학사의 연구에서 외래문학의 영향문제는 가끔 國文學硏究法자체로 해결할 수 없는 측면을 부분적으로 해결해 주는 利點도 있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프랑스의 비교문학이나 國文學硏究法인 실증적이고 역사적 방법이 요구되고 있다. 적어도 影響과 源泉의 문제롤 포함한 文獻學的硏究와 이에 수반되는 문학연구의 요건이 확립될 때까치 필요한 것이다. 이 실증적이고 문헌학적 방법으로 해곁돼야 할 基礎資料가 정리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세운 假說들이 무너질 위험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증적이고 역사적 연구방법을 바탕으로 한 國文學硏究가 어느 정도 본격적인 軌道에 올라설 때는 문학연구의 본령을 되찾아 文學理論과 批評울 기저로 한 審美的領域으로 전환·수정돼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6)
두 가지 지점이 ‘말할 것도 없다’. 첫째, 근대문학은 전통적인 요소보다 외래문학적 영향요소가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둘째, 실증적이고 역사적 연구방법으로 국문학연구가 궤도에 오리면 문학연구의 본령인 문학이론과 비평을 기저로 한 심미적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두 가지 ‘자명함’이 결합됨으로서, 근대문학의 실증적 연구로서 비교문학 영향관계 파악이 필요하다. 즉 ‘말할 것도 없’기 때문에 논증하지 않는다.
3. “영향관계가 심층적인 차원까치 전개됐다기보다는 詩的發想法이나 詩語내지 이미지의 어느 한 局面의 영향에 머문 한계성을 노정”했다는 귀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글에 따르면 영향관계는 심층과 표층을 나눌 수 있다. 표층은 시적 발상법, 시어, 이미지의 한 국면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고, 심층은 이를 아우르는 총체성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렇게 ‘총체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을 ‘심층적’ 영향이라고 한다면 1. 그러한 영향은 새로운 시인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에피고넨을 창출하는 것이다. 2. 다른 언어로 그러한 영향이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할 때에도, 이는 시로서 성공할 수 있는가? 즉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는가?
여기서 김학동은 거의 정확히 ‘같은 것’을 심층적 영향으로 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베를렌과 김억을 비교하며, 베를렌은 "落葉과 같이 표류하는 영혼이 내면화한 시적 율조를 타고 흐느끼는 것" 이지만 "외형의 고정된 악성만을 표방한 나머지, 영혼은 별개로 유리되고, 작자는 가시형상에 머물러 애상하는 것이 김안서의 시세계“라고 평가한다. 그러면 우선적으로 ‘내면화한 시적 율조’가 분석되어야 하는데, 이는 분석되지 않는다. 단지 자유시형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한다면, 프랑스 시사의 맥락에서 ‘자유시’의 의미가 식민지 조선의 상황(프랑스어로 쓰인 정형율 시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자유시의 의미가 조선에서는 불가능했던 상황. 조선어에 대한 연구 및 가용 가능한 어휘들의 폭 등) 가능하지 않았던 역사적 배경을 따져야 한다. 그리고 김억이 서 있는 전통의 맥락 속에서 왜 차이가 났는지를 따져야 한다. 김억 초기시를 살펴보면, 프랑스 상징주의적 어휘가 한시의 구조 속에 담겨져 있다. 즉 ”베를렌을 읽는 선비“와 같은 모습이 김억 초기시이고, 이는 한국 근대시 형성의 중요한 이미지이다.
프랑스 상징파의 시와 시단을 논의하고, 그것을 전범으로 시를 썼으면서도 그 본질적인 핵심의 파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그 시대 상징주의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이해가 수반되지 못했던 시대상의 반영이기도 하고, 그 수용과정에서 실패를 자초했던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한국 근대시에 미친 프랑스 상징파 시의 영향문제는 이러한 한계성 위에서 해명돼야 할 것이다. 상징주의의 영향하에서 그것을 표방하여 시를 썼으면서도 그 내면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시어나 이미지 및 발상법의 어느 한 국면을 모방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133)
즉 김학동에 따르면 온전한 수용이 아닌 것은 수용에 ‘실패’한 것이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내면’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고, 이를 한국시에서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표였던 것이다.
김학동의 이 연구는 한국문학의 비교문학적 연구에서 백철, 김병철, 송욱 등을 계승하고, 뒤이어 심원섭, 구인모, 최태원 등의 연구로 보안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60~70년대적인 문학연구의 사상사를 정리한다고 할 때, 김학동의 연구는 당대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이는 서구적 근대의 보편성을 믿고 또 체험하고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꿈꾸었던 세대의 작업이었다. 이렇게 ‘실패’한 문학사를 그림으로서, ‘올바른’ 서구문학의 수용을 주장하는 것이 이 책의 담론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1930년대생은 모두 이렇게 환원될 수는 없다. 김윤식, 김용직, 백낙청, 조동일(1939~ ) 등과 함께 비교할 때, 이들 세대의 담론적 지형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재선(1936~ ), 김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