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학 - 읽기의 무한에 관한 탐구
요시카와 고지로 지음, 조영렬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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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들에게 강추하는 책. 시 연구자는 당연히 강추하고, 소설은 물론 비평 연구자들이 계발될 지점들이 많을 것 같다.

0. 書不盡言, 言不盡意
요시카와 고지로의 방법론은 청대의 고증학을 계승하여, 책에 쓰인 글자가 끝나는 곳의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끝나는 곳의 ‘뜻’을 면밀하게 읽는 것이다. 이는 시를 읽는 방법으로 모든 글을 읽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구어와 문어의 격차가 크고, 문어의 압축미를 강조했던 구양수 등의 문체는 이러한 방법론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단지 중국 특정시대 문체에 대한 방법론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분과학문의 존재의의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방법론이다.
그는 역사/철학과는 다른 지점에 문학(요시카와는 문학연구라 특정하지는 않지만, 언어에 대한 연구. 그러나 언어학은 아닌 오늘날 ‘문학’연구와 같은 연구) 연구를 놓는다. 역사가 사실을 중시하고, 철학이 애초부터 보편을 탐구한다면, 문학은 좀 더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개별을 언어를 매개로 탐구한다. 세상은, 사람은 무한히 복잡하다. 언어는 제한되어 있다. 작가들은 이 무한한 복잡함을 제한된 언어 속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독자는, 문학 연구자는, 이 제한된 언어 속에서 그 무한한 떨림을 포착해야 한다. “사실 그 자체를 중시하는 동시에, 사실에 의해 생겨난 저자의 의식, 혹은 의식을 처리하는 저자의 태도를 중시하는 방법이 존재할 필요가 있다.” (98)
이를 위해 요시카와 고지라는 단어 하나하나 어기 하나하나에 주의한다. 십대 때, 누군가를 처음 좋아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의 문자 속에 있는 쉼표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듯이, 그렇게 시를, 문장을, 역사서를 읽는다. 이것은 과도한 작가 환원주의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라는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작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을 수 있는 어떤 미세함을 통해 텍스트의 복잡성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일본시에서 같은 모음이 겹치는 것은 중국시와 달리 자각적이지도 의식적이지도 않다. 시인의 자각에도, 독자의 의식에도 반드시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의식 아래에 미치는 작용은 미묘하게 존재할 수 있다. (175)” “내가 설명한 그 모든 것을 사마천이 의식적으로 조절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의식하지 않은 채 진행된 것이 더욱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효과가 더욱 미묘해질 수 있다.”(202)

즉 요시카와 고지라가 지향하는 지점은 ‘의식적 작가’의 의도를 넘어선 곳에 있다. 계사전의 書不盡言, 言不盡意에 덧붙이자면, 意不盡實이다. 意가 아니라 實을 탐구하고, 이를 재구성해내는 방법론.

1. 오규 소라이를 ‘대선배’라 지칭하는 태도.
이러한 요시카와 고지로의 태도는, 오규 소라이를 ‘대선배’라고 호명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오규 소라이의 고문사학은 고문과 수백년의 거리가 있는 주자학의 시각으로 고문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문의 자의, 문리를 정밀하게 따지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근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80년대 학번의 학자들만해도 ‘선배’라는 생각보다는 ‘선생’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선생과 선배는 다르다. 선생은 나보다 먼저 세상에 태어난 이로서,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자이다. 반면 선배는, 나보다 먼저 공부에 들어선 자이지만, 그의 문제의식과 나의 문제의식이 연속선상에 있는 존재이다. 나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지만, 선배에게서는 그의 시대 속의, 학문 속의 문제의식을 배우고 공유한다는 의미가 있다. 적어도 그런 감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요시카와 고지로가 오규 소라이를 ‘대선배’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고전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감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근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도 충분히 숙고해야만 하는 태도라고 여겨진다.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4.19세대가, 식민지 시기 임화, 최재서 그리고 김억, 김소월의 시대 속에서 그들의 문제의식을 배우고 공유하는 것이, 그들을 ‘선배’로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2. 논어 자재천상왈(子在川上曰), 서자여사부(逝者如斯夫), 불사주야(不舍晝夜)에 대한 다산과 이유원의 해석.
한 가지 요시카와 고지로의 책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고려, 조선의 유학자들의 논의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뿐만 아니라, 다산이나 이유원의 해석, 또는 최한기의 해석과 그들이 놓여있던 문맥을, 요시카와 고지로가 주목하는 오규 소라이, 게이추 등의 문맥이나 깊이와 더 나아가 중국의 맹자, 주자, 왕안석 등과는 어떻게 다르게 울리고 있는지 비교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문제일 것이다. 특히 다산은 논어고금주를 쓴 바 있다. 이와 본격적인 비교하는 작업은 이러한 질문에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산과 이유원의 해석을 제외하고 조선조 시문에서는 맹자의 해석과 결부시켜 이 대목을 해석한 것이 대부분으로 보인다. (윤선도, 󰡔고산유고󰡕; 이곡, 󰡔가정집󰡕; 이현일, 󰡔갈암집󰡕 등. 󰡔조선왕조실록󰡕, 정조 2년 무술(1778) 12월 15일(신미)에도 시독관 심염조(沈念祖)가 동일하게 논어를 강하고 있다.) 그러나 다산은 여러 주석들을 제시하고 분석하고 있다.

補曰 逝者,人生也。自生至死,無時不逝。【〈魏風〉편002云:“逝者其耋。”】 ○補曰 斯,爲川也。舍,止息也。○邢曰:“見川水之流迅速,且不可追復,故感之而興歎。”
包曰:“凡往也者,如川之流。” ○案 逝者之爲何物,注疏皆不明言,將謂之日月之光陰乎?光陰者,晝夜也。謂晝夜,不舍晝夜,其言無味,將謂之‘天地化生之機ㆍ天體健行之運,晝夜不息’乎?天道循環,無往不復,非如川流之一逝而不反,其喻未切。惟吾人生命,步步長逝,無一息之間斷,如乘輕車而下斜坂,流流乎不可止也。君子進德修業,欲及時也,而學者恆忘此機,此夫子所以警之也。【《孟子》曰:“源泉混混,不舍晝夜。” 別是一義,非此經之所宜引】
王應麟曰:“《楚辭辨證》云,‘洪引顏師古曰,「舍,止息也。屋舍ㆍ次舍,皆此義。《論語》不舍晝夜,謂曉夕不息耳。今人或音捨者非是。」’ 《辨證》乃朱子晚歲之書,當從之。”

다산도 맹자를 참조로 하여, 이를 공자가 학인들에게 경계한 말이라고 풀이한다. 덧붙이는 다산의 말은 우리들의 생명이 간단없이 중지함이 없이 나아간다고 한다.
惟吾人生命,步步長逝,無一息之間斷,如乘輕車而下斜坂,流流乎不可止也. 君子進德修業,欲及時也,而學者恆忘此機,此夫子所以警之也。

흥미로운 것은 如乘輕車而下斜坂라는 대목으로, 수레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가는 것 같다고 비유한 대목이다. 이처럼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논어집주에 해당될 수 있는 대목을 떠올려보면, 공부를 계속 하여 익숙해지면, 공부를 멈출 수 없다는 대목이 있다. “說은 喜意也니 旣學而又時時習之면 則所學者熟而中心喜說하여 自不能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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