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사란 무엇인가? - 역사가가 텍스트를 읽는 방법
리처드 왓모어 지음, 이우창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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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리처드 왓모어, "지성사란 무엇인가? -역사가가 텍스트를 읽는 방법", 이우창 옮김, 오월의봄, 2020.

'지성사'에 관심을 두고, 스키너의 책도 논문에 인용하여 박사 논문을 써서 더욱 관심을 두었던 책. 충실한 역주와 매우 잘 설명하고 있는 역자 후기가 반갑다. 이 책을 읽으면, 결국에는 포칵이나 스키너 등의 주저작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성사에 대한 유혹서로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다. 다만,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 책만 읽고 바로 '지성사' 연구 방법론을 배워서 이를 자신의 연구에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방법론적 설명은, 한국어로 번역된 스키너의 "역사를 읽는 방법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이 더 자세하다.(두 책의 한국어 제목과 부제를 보면 그 유사성이 흥미롭다) 그러나 지성사 자체가 어떠한 '맥락' 속에서 발화했고 변화해왔는지를 지성사적 접근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하나의 지성사 연구의 사례(지성사에 대한 지성사?)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지성사 개설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지성사의 구체적 성과들의 혁명성이나 방법론적 특성이 구체적으로는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기 위해 채택하고 활용하는 일련의 전제를 언어 혹은 담론이라고 할 때, 저자가 활용하는 언어 혹은 담론이 저자의 주장 자체에 제한을 가한다는 것이다. 언어 또는 담론은 문법과 수사, 그리고 관념의 용법과 함의에 관한 일련의 전제로 구성되어 마치 복잡한 구조물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언어 사용자들이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할 때, 그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저자들은 기존에 존재하는 언어들을 혁신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언어라는 복잡한 구조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 현재 및 물질적 현재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101)

여기서 "저자가 활용하는 언어 혹은 담론이 저자의 주장 자체에 제한을 가한다는 것", "문법과 수사, 그리고 관념의 용법과 함의"가 어떤 식으로 제한을 가하고 이를 텍스트들에서 어떻게 추출해서 논의하는지는 문학 연구자로서 매우 관심 있는 주제이다. 특히 서구의 긴 수사학적 전통을 떠올린다면, 어떠한 '수사'가 담론에 제한을 가한다는 식의 설명은 문학 연구자라면 눈이 번쩍 떠질 만큼 매력적인 연구이다. 그런데 이를 알기 위해서는 포칵이나 스키너 등의 연구를 살펴야 한다. 제한된 분량상 이를 담지 못했다고 해도, 이에 대한 구체적 예시나 설명이 거의 없는 것이 아쉽다.


여기서 말하는 '지성사'는 당대에 중요한 '주장'을 했던 텍스트/사상가에 대한 연구에 해당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텍스트는 일종의 주장으로 읽을 수 있는데, 이를 '시'라는 담론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론적 변용이 필요할까. 저자의 발화수반적의도 자체를, 저자가 모를 때. 또는 그 발화수반적의도가 '시' '미적인 것' 자체일 때, 그 '시'나 '미적인 것'을 당대 또는 해당 저자를 둘러싼 맥락을 파악하는 것을 통해서 추적하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문학사/문학연구란 무엇을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윗모어는 “가장 뛰어난 지성사 연구자들 다수는 학문적 연구와 가치평가 작업이 병행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혹시 지성사가 스스로 과거의 저자에게서 혐오스러운 주장 혹은 관념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요점은 왜 저자가 그런 관념을 세계에 내놓았는지, 그리고 당시의 맥락에 입각할 때 어떻게 그런 논변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 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상황을 좀 더 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며, 더불어 당시에 해당 논변이(설령 지금 우리에게 매우 끔찍하다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 유효했는지 통찰할 수 있게 된다.” (214)

라고 주장한다. 저자를, 텍스트를, 논변에 대한 '판정'하는 것보다는 '이해'하는 것이 우선된다. 이는 어느 정도 당대에 영향력이 있고 '성공'한 텍스트를 해명하는 데 더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대에 '실패'했지만, 후대에 '성공'한 텍스트들이 실패했던 맥락 등도 고찰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문학사/문학연구도 이 '이해'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이것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 지성사적 접근만으로 문학은 해명될 것인가? 물론 이 책의 저자도 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 연구자로서 지성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무엇을 '더' 또는 '다르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는 어떤 문학 텍스트 어떤 작가를 연구해야 하느냐는 기준이 문제가 된다. 정통적인 '순문학' 연구자들은, '문학적 가치'라는 기준에 따라서 높은 '문학성'이 있는 작품들을 연구했다. 물론 이 '문학성'이라는 것은 당대 기준으로 평가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작업은 일종의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좋은 예로,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기존 남성중심주의적 '정전'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전'을 발굴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에 대해서 앞선 지성사 연구의 입장이라면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의 가치를 바탕으로 과거의 텍스트를 재단하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떠한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 당대의 맥락들을 섬세하게 복원한다는 것. 우리가 시를 연구한다고 했을 때, 이것으로 충분할 것인가? 그 시의 '아름다움', '문학적 가치', '정치적 가치'가 시대에 한계에 제한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또 문제적인 지점은 과거와 오늘날 사이의 섣부른 연결을 경계한다는 것이, 아예 연결을 사유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기원'이 아니라 '원천'으로서의 문학 텍스트. 100년 전 시를 읽고 이를 연구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ps. History of idea가 '지성사'로 옮겨지게 된 맥락은 무엇일까. 관념사, 사상사, 지성사 등에서 '지성'이라는 번역어의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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