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사이프러스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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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에 세상에 나온 크리스티의 이 소설은 구성이 굉장히 독특하다. 프롤로그에서는 재판이 진행 중인 법정을 비추며, 이 재판의 피고가 누구이고 그녀의 죄목이 무엇인지 나온다. 1부에서는 재판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피고가 살해했다고 의심을 받는 사람이 살아있었던 시간으로, 그녀가 죽기 전까지의 상황이 그려진다. 2부에서는 푸아로가 이 사건에 대해 수사하는 과정이 나오며, 3부에서는 다시 법정으로 돌아가 프롤로그의 뒷부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목이 독특했다. 슬픈 사이프러스. 본문이 시작되기 전 셰익스피어가 인용되는데, '십이야'의 한 구적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다른 출판사에서 이 책의 제목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삼나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확히 말하면 삼나무가 아니고 편백나무라고 한다. 두 나무는 언뜻 보아서는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른 종으로, 두 나무 중 하나를 검색할 경우 두 나무의 구분법이 관련 검색어로 뜰 정도이니, 이 소설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나무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알지 못할 경우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프러스, 그러니까 편백나무는 상중을 의미한다고 한다. 셰익스피어가 '십이야'에서 저 구절을 쓴 것도 슬픔에 잠긴 주인공이 저 나무로 짠 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노래하는 부분이었다고. 그런데 여기까지의 소설 밖 지식을 알고 난 후에도, 이 책의 제목이 왜 <슬픈 사이프러스>인지는 여전히 알수가 없었다. '십이야'는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인데, 내 기억이 맞다면 '십이야'는 난파 후 함께 있던 쌍둥이 오빠와 헤어지고 남장을 하여 한 귀족의 하인 역할을 하던 여성이 주인공으로, 귀족의 짝사랑 대상이었던 여자로부터는 연정을, 자신이 모시던 귀족으로부터는 질투를 받다가 쌍둥이 오빠가 등장한 후 두 남녀가 각각 짝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소설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형식적으로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처음부터 시선을 집중시키는 법정 장면, 플래시백으로 돌아간 과거,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이어지는 공방. 초반부터 살해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죽었는지 밝혀지고, 줄줄이 불리한 증언들이 이어지다가 사소한 사실 하나로 한번에 뒤집히는 사건. 타임스로부터 '스릴러를 표방한 소설들의 난립에 지친 독자들을 다시금 고전적 본격 추리의 매력으로 빠져들게 할 걸작' 이라는 극찬을 받았다는데 딱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호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처럼 젊은 분 입장에서는 조금 귀찮지요? 전문의가 되고 싶지 않으세요? 시골의 일반 개업의 일이 지루하지 않으세요?"

로드는 모래빛 머리를 저었다.

"아뇨. 저는 이 일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좋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질환이 좋거든요. 아무도 모르는 질병의 희귀한 병균 연구를 파고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홍역, 수두, 기타 등등이 좋아요. 사람들마다 그런 병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는 것도 좋고요. 이미 알려진 치료법을 개선할 수 없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저의 문제점은 야심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저는 구레나룻이 길게 자라고, 사람들이 '그래, 우리 마을에는 로드 선생님이 계시지. 좋은 양반이야. 하지만 방법이 너무 구식이란 말이야. 젊은 아무개가 최신식이라던데, 그 사람을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말을 할 때까지 여기서 살 겁니다."

 

법정 장면 후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1부와 2부에서는 피고, 피해자,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인물이 어떤 성격인지 대화를 통해 묘사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이런 부분들을 읽고 있으면 마치 그 인물이 소설 속에서 빠져나와 구체적인 형태를 띄고 내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예상보다 이런 경우가 흔하거든요. 일종의 미신 같은 겁니다. 시간이 많다고들 생각하는 거죠. 유언장을 쓰기만 해도 죽음의 그림자가 더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터무니없는 발상이지만, 실상이 그렇습니다."

(중략)

"하지만 처음으로 발작을 일으키신 뒤에는......?"

세던 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더 완강하게 거부하시더군요. 아예 유언장이라는 단어 자체를 들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디가 물었다.

"이상한 일 아닙니까?"

세던 씨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아, 아닙니다. 병환 떄문에 더 불안해지신 거죠."

엘리너가 어리둥절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죽고 싶다고 하셨는데......."

세던 씨가 안경을 닦으며 말했다.

"엘리너 양, 인간의 머리는 아주 재미있는 구조로 되어 있답니다. 웰먼 부인은 죽고 싶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계셨을 겁니다. 그런 희망 때문에 유언장을 만들면 재수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셨겠죠. 부인은 유언장을 만들 생각이 없으셨던 게 아니라 영원히 미루셨던 겁니다."

세던 씨는 갑자기 로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친근한 말투로 물었다.

"사람들이 하기 싫은 일, 대면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어떤 식으로 미루고 피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로디는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예, 물...... 물론 잘 알죠.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바로 그겁니다. 웰먼 부인꼐서는 예전부터 유언장을 만들 작정이었지만, 오늘 할 일을 계속 내일로 미루셨던 겁니다! 시간은 많다고 계속 자기 최면을 걸면서 말이죠."

 

이런 부분도 마찬가지. 사람이란 원래 감정에 휘둘리거나 미신적인 요소를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일수록 역으로 이런 경우가 많다. 여러 의미에서 인간은 참 모순적인 존재로, 크리스티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그런 경우가 많은데, 특히 이 소설 속에서 유언장도 없이 엄청난 재산을 남기고 사망한 노부인에 대한 묘사가 그런 의미에서 퍽 인상적이었다. 더구나 이 대화에서는 겉으로는 노부인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지만, 단 두 문장을 통해 다른 주요 인물의 성격에 대한 단서마저 제시한다.

 

이 소설 속에 느껴지는 크리스티의 노련함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단 몇 줄 만으로도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거나, 인생의 진리를 꿰뚫어보는 듯한 통쾌함은 물론이다. 피살자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상이 푸아로가 누구에게 물어보느냐에 따라서 매번 달라지는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짝사랑하던 청년에게는 한 송이 꽃과 같았던 사람, 피고에게 연정을 품고 푸아로에게 사건을 의뢰한 마을의 의사에게는 착한 아이, 노부인의 간호사이자 그녀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었던 이에게는 당장 영화계로 진출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고, 노부인의 가정부는 거들먹거리는 젊은 여자였다는 것. 이런 부분을 영상화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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