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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8 (완전판) - 밀물을 타고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평점 :
이때가 1944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에르퀼 푸아로를 찾아온 것은 1946년 봄이었다.
내가 대충 읽은 것이 아니라면, 크리스티의 소설 속에서 명확하게 시간이 나온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추리 소설로서의 의무 때문에, 날짜와 시간, 계절등은 명확하게 제시되지만, 연도까지 세세하게 알려준 적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저 문장을 집어넣은 이유는? 크리스티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문장이라는 점에서 꼭 저 문장을 써서 강조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잇다. 1944년 가을, 제 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 그리고 1946년 봄, 전쟁이 끝난 직후.
1890년 영국에서 출생한 크리스티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약제사와 간호사로 근무했다. 이때 그녀는 20대였다. 그녀의 첫 소설은 1920년에 나왔고,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0대. 이 소설은 1948년에 나왔다.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을 일생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겪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0대였던 첫번째 전쟁 당시 그녀는 부상자를 돌보는 병원에서 일을 하였고, 50대였던 두번째 전쟁 당시 그녀는 한참 소설을 정력적으로 쓰고 있던 유명한 작가였다. 한창의 나이에 젊음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했을 것이며, 친척과 지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비록 승전국이었지만 전쟁 후 경제 위기와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자국민에 대해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잔인한 이야기이지만, 소설가에게 전쟁과도 같은 참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의 소설가들이 전쟁 그 자체와 남북분단을 겪으며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녹아 있는 귀한 소설들을 썼다. 전세계적으로는 더하다. '전쟁과 평화'를 쓴 톨스토이도, '무기여 잘 있거라'를 쓴 헤밍웨이처럼 직접적인 언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쟁 그 이후의 삶을 다룬 소설들 중 빼어난 명작은 정말 많다. 이런 고전들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벼운 소설을 쓰는 대중 소설가인 크리스티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녀 작품의 주인공의 상당수가 군인이며, 대표적인 인물인 푸아로의 친구 아서 헤이스팅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부상으로 제대한 인물로 나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린도 여자해군부대에서 근무했다가 종전과 함께 제대한 것으로 나온다.
제1차세계대전보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한 영국의 피해는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규모로도 그렇고, 기간으로도 그렇다. 그녀의 초창기 소설에서 전쟁이라는 소재는 다소 낭만적으로 댜루어지고 있는 반면에, 이 소설 속의 전쟁은 좀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종전 직후, 당시 영국 국민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척박한 삶을 버텨야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린은 언제나 결심히 확고하고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았다.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생활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래. 바로 그거였다.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기분! 아무 목적도 계획도 없이 살아가는 것. 군을 제대하고 집에 돌아온 이후 린은 줄곧 그런 기분이었다. 전장에 나가 있던 시절에는 향수병에 젖어 살았다. 그때는 정해진 의무가 명확하게 있었고, 삶에는 계획과 질서가 잡혀 있었다.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압박에서 벗어나 있던 시기였다. 이런 생각을 하나하나 하고 있자니 린은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도처에서 모두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결국 전쟁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인가? 바닷속 어뢰,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 사막을 건널 때면 똑똑히 들려오던 '탕'하는 총탄 소리처럼 눈에 보이는 위험이 무서운 게 아니다. 생각을 멈추면 사는 게 훨씬 쉬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그런 정신 상태가 무서운 것이다. 린 마치몬트는 더 이상 입대할 때처럼 단순하고 결단력 있고 똑똑한 여자가 아니었다. 전에는 특정한 분야에서 이미 정해진 경로를 따라 머리를 쓰면 되었다. 이제 다시 한 번 삶의 주인이 되었지만, 문제와 맞서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자신을 보고 린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평범한 '가정주부'들이야말로 전쟁을 통해 진정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라고 하면 정말 이상하겠지. 이들에게는 수많은 '금기 사항'이 족쇄처럼 붙어 다니기는 하지만 따라야 할 명확한 '의무' 같은 건 전혀 없다. 이들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사고해 그떄그때 상황에 맞게 방편을 마련할 수 있어야 했다. 모든 재능을 짜내야 했고, 심지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재능까지 계발해야 했다. 지금 린은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똑바로 서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책임질 수 있는 건 그들뿐이라고 생각했다. 훌륭한 교육을 받고 똑똑하며 우수한 지능과 철저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을 무사히 마친 린 마치몬트 자신은 정작 방향도 결의도 잃어버린 상태였다. 입에 올리기 싫지만 표류하고 있다는 게 딱 맞는 말이었다.
'고향에 죽 머물렀던 롤리 같은 사람들은 어땠을까.'
전쟁 직후 집으로 돌아온 린. 변함없다고 생각했던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은 스스로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을 비롯해 온 일가 친척을 돌보아주던 든든한 외삼촌은 딸 뻘인 여자와 결혼하자마자 유언장도 없이 사망하였고, 전재산이 미망인에게로 넘어가버려 그녀를 비롯한 친척들은 생계조차 어려운 현실. 그 와중에 새롭게 시선을 끄는 남자는 외삼촌과 재혼한 그 젊은 여자, 자신을 비롯해서 온 친척을 경제적 곤궁에 빠지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여자의 오빠다. 그 여자는 외삼촌과의 결혼이 두번째로, 첫번째 결혼 후 남편은 아프리카에서 사망하였고 그곳에 묻혔다. 그러던 중 마을에 의문의 남자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고, 죽은 남자의 친구는 그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진 첫번째 남편이라고 법정에서 증언한다. 끝까지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젊은 여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황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그녀의 오빠가 체포된어 재판을 받게 된다. 만약 죽은 남자가 첫번째 남편이 맞다면, 두번째 결혼은 중혼이 되므로 무효가 되어 버리며, 그녀가 상속받은 남편의 거대한 재산은 다시 몰수되어 가까운 친척들에게 분배되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횡재를 하게 된 동생 덕분에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던 오빠에게는 살인 동기도 있고, 기회도 있었다.
"물론 전 형사사건에는 경험이 전무합니다. 하지만 의학적 증거란 것이 일반인이나 소설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틀릴 수 있어요. 의학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진단이란 게 뭡니까? 빈약한 지식을 근거로 추측하는 거 아닙니까. 애매한 단서는 한 가지 방향만 제시하지 않지요. 전 홍역을 진단하는 데는 꽤 자신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의사로 활동하면서 홍역에 걸린 사례를 수백번이나 보았고 수없이 다양하게 변형된 징후와 증상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역설적이지만 선생이 교과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홍역에 걸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의사로 살면서 전 별별 일을 다 보았습니다. 한 여자는 맹장염인 줄 알고 수술대까지 갔다가 수술 직전에 파라티푸스 진단을 받았지요. 또 열성적이고 성실한 한 젊은 의사는 피부병에 걸린 아이를 보고 심각한 비타민 결핍이라고 진단했지만, 그 동네 수의사가 엄마한테 와서는 아이가 안고 있던 고양이가 백선에 걸려 아이에게 옮은 거라고 설명해 주었지요.
선입관에 피해를 입기는 우리 의사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살해당한 것이 분명한 한 남자의 시신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피가 얼룩진 부젓가락이 놓여 있고요. 그가 다른 물건으로 가격당했다고 하면 터무니없어 보이겠지요. 물론 두부 골절을 치료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드리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저는 뭔가 다른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표면이 그렇게 매끄럽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은 물건 말입니다. 아, 뭐라고 해야 하나. 모서리가 있는 물건, 벽돌 같은 것 말입니다."
죽은 남자의 뒤를 이어, 증언했던 사람이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고, 뒤이어 젊은 미망인마저 자살한다. 세 사람이 죽었고, 스펜스 총경은 살인이 한 건, 자살이 두 건이라고 정리하며 푸아로는 자살이 한 건, 사고가 한 건, 살인이 한 건이라고 단언한다.
"맞습니다, 이번 사건은 영락없이 셰익스피어 작품 같습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요. 셰익스피어라면 그 모든 질투며 증오, 열정에서 나온 도발적인 행동들을 엮어서 멋들어지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겁니다. 또 이 사건에는 기회에 성공적으로 편승한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인간사에도 파도처럼 흐름이 있나니, 밀물을 타면 행운을 만나리.......' 총경님, 바로 이걸 따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회를 잡아서 자기 나름의 목적에 맞게 변용한 사람 말입니다."
여기에서 제목의 의도가 드러난다. 푸아로가 인용한 저 문장은 셰익스피어 작 「줄리어스 시저」 제 3장 중 브루투스의 대사이다. 기가 막힌 타이밍, 그로 인해 행운을 거머쥐었던 범인. 범인의 정체보다도 세 명의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게 되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 더,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덧붙인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종전 후 피폐해진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절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던 문장.
화창한 아침이었다. 꼭 여름 같은 봄날의 이런 아침에는 정작 여름에는 맛볼 수 없는 상쾌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