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손가락의 아픔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홍현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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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와 터펜스는 잘 있나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죠?' 라며 내게 안부 편지를 보내온, 영국과 다른 나라의 많은 독자에게 이 책을 바친다. 여러분 모두에게 안부를 전하며 토미, 터펜스와 즐거운 해후를 나누길 바란다. 더 늙긴 했지만, 영혼은 조금도 시들지 않은 이 부부와!

 

애거서 크리스티

 

1968년에 나온 이 소설은 토미와 터펜스가 나오는 네 번째 책이다. 20대 초반의 친구였던 <비밀 결사>가 1922년, 서른 살 전후였던 <부부 탐정>이 1929년, 장성한 1남 1녀를 둔 중년이었던 <N 또는 M>이 1941년. 정확하지는 않지만 둘 다 확실히 60은 넘었을 이 소설에서는 자식들마저 결혼하고 손주까지 본 것으로 나온다. 아마 크리스티 조차도 이 한 쌍을 자신의 소설에서 오래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 부부는 이 소설 이후 <운명의 문>이라는 1973년 소설로 한 번 더 등장한다.

 

엄지가 쑤시는 걸 보니, 뭔가 불길한 일이 닥치려나 보다.

-셰익스피어 「맥베스」 중에서

 

크리스티는 종종 셰익스피어의 글에서 제목을 인용하는 경우가 있다. <슬픈 사이프러스>도 그랬고, <밀물을 타고>도 그랬다.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테니슨의 글에서 인용한 <깨어진 거울>도 있다. 이 제목들은 사실 이 소설의 내용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약간 어거지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 다른 소설에 갖다 붙이거나 서로 바꾸어 제목을 붙여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 '엄지손가락'이라는 것이 큰 복선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요양원에 있던 토미의 친척이 사망한다. 친척이 머물던 방에 있던 그림은, 부부가 3주 전에 친척을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보지 못했던 그림이다. 친척이 아니라, 같은 요양원에 있던 노부인이 주었다는 그림. 터펜스는 그 노부인과 3주전 방문했을 때 대화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다시 한 번 노부인을 만나려고 하나 얼마 전 친척이 데려갔다는 말을 듣는다.

 

"우스워요. 전에 여기 왔을 때는 이 그림을 보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이상한 게 이 풍경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그림 속의 집이 내가 본 어떤 집과 닮았을 수도 있고. 어쨌든 이 집이 생생히 기억나요....... 우스운 건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 모른다는 거지만."

 

그림을 선물했다는 노부인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그녀를 데려갔다는 친척의 주소는 엉터리였다. 3주 전, 자신에게 했던 말이 이상했지만, 단순히 노망으로 여겼던 터펜스는 이상한 것을 감지한다.

 

"랭커스터 부인도 떠나셨다고 들었어요."

"네, 친척 분이 데려가셨죠. 가고 싶어 하지 않으셨는데, 안되셨어요."

"그분이 제게 접견실에 있는 벽난로 얘기를 하셨었는데, 그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그분은 이야깃거리를 많이 갖고 계세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과, 또 자신만 아는 비밀까지......."

"어떤 아이에 대한 내용도 있엇어요. 납치된 아이인지, 살해된 아이인지......."

"노인들은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꾸며내세요. 텔레비전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도 허다하고요."

"그런 노인들과 일하는 게 힘들지 않아요? 피곤할 것 같은데."

"아뇨, 전 노인들을 좋아해요. 아니면 제가 왜 노인 돌보는 일을 자청했겠어요."

"여기 계신지는 오래 되셨나요?"

"일 년 반 정도요....... 다음 달에 떠나긴 하지만요."

오키프 간호사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대답했다.

"왜죠?"

처음으로 오키프 간호사가 뭔가 감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글쎄요, 베레스퍼드 부인, 누구나 변화가 필요한 법이라......."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열정만큼은 청춘인 터펜스는 그림 속의 집을 직접 찾아나선다. 어디서 보았을까, 온 기억을 총동원해내 떠올린 그녀는 3년 전, 대녀의 딸이 다니는 학교로 갔다가 돌아오는 열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곳을 보았던 사실을 기억해낸다. 주인은 있을 테지만, 아무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집. 터펜스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서 밖으로 나가 수색을 했어요. 아이의 시체를 금방 찾은 적도 잇고, 몇 주씩 찾지 못한 적도 잇엇죠. 어떨 때는 우리가 이미 수색을 끝낸 아이의 집 근처에서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더랬어요. 미치광이의 짓이 분명해요. 끔찍, 끔찍하지만 그런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인간들은 다 쏴 버려야 해요. 그 인간드로 똑같이 목 졸라 죽여야 한다고요. 누가 내게 그런 기회를 준다면, 나라도 직접 그런 인간들을 죽여 버리고 싶어요. 어린아이를 덮치고 죽이는 더러운 인간이라니. 그런 인간들을 정신 병원에 넣고 가정처럼 포근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치료한다는 게 말이나 돼요? 그 인간들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정신병원에서 기어나오죠. 치료가 되었다면서 집으로 보내는 거예요. 노퍽 어딘 가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죠. 거기 사는 여동생이 얘기해 줫는데,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지 이틀 뒤에 똑같은 짓을 저지른 남자가 있었대요. 미친놈들이죠. 의사들도 똑같아요. 치료되지도 않은 사람을 다 나았다고 하니까요."

 

친절하지만 어딘가 묘한 느낌을 주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마을의 온갖 이야기들을 들으며 다니던 터펜스는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고 쓰러진다. 그러고 보니, 이 부부는 꼭 번갈아가면서 작품마다 뒤통수를 맞고 쓰러지는데, 볼 때마다 기절할 정도로 세게 머리를 맞는데 어떻게 나중에 문제가 전혀 없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부 중 한쪽이 머리를 맞고 실종되면, 다른 한 쪽이 찾아다니는 구성을 매번 쓰는 작가가 좀 게으르다는 생각도 들고.

 

돌아오겠다는 아내는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는 가운데, 요양원의 의사가 토미를 찾아온다. 얼마 전에 사망한 요양원의 한 노인의 부검 결과 다량의 모르핀이 검출된 것이다. 원래 모르핀을 투여받는 환자가 아니었기에, 어떤 사건이 있음을 짐작한 의사가 과거 정보부에서 일했던 토미에게 상의한 것이다. 토미는 요양원을 떠나 종적이 묘연한 노부인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 부부의 활약의 내용은 늘 국가와 국가를 넘나드는 첩보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1차세계대전부터 제2차세계대전까지의 시간이 겹쳐 있기 때문에, 외국의 스파이, 영국의 고위직이 등장하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뭔가 이야기가 크게 될 것 같다고 주저앉아 버린 느낌이다. 물론 종전후 꽤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두 주인공의 나이가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외딴 곳에 있는 주인을 모르는 저택,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변호사의 범죄행위, 이미 사망한 유명 화가의 그림과 미망인, 연속되는 살인과 실종 등 재미있는 요소를 그냥 나열만 하고 끝내버린 느낌이랄까. 사건이 밝혀진 직후, 그 전말은 좀 허무하기도 했다. 단순히 광기로만 모든 범죄의 이유를 설명해 버린다면, 왠지 반칙 같은 느낌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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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기억한다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근희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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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드네 양은 기억력이 참 좋다니까. 그래서 걔들이 그랬잖아. 하나는 아리아드네 양을 '코끼리 여사'라고 부르고, 또 하나는 '백조 여사'라고 불렀던 집에 놀러오던 남자애 둘 말이우. 그러면 아리아드네 양은 그 남자애를 등에 태우고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 긴 코로 물건을 집어 올리는 시늉을 했어."

"많은 것들을 기억하시는군요. 그렇죠, 유모?"

올리버 부인이 말했다.

"아, 코끼리는 잊지 않는다잖아. 옛날 속담에 말이야."

매첨 부인이 말했다.

 

<코끼리는 기억한다>니 제목이 참 특이했다. 혹시 <벙어리 목격자>와 같은 작품이 아닐까, 사건 현장에 코끼리가 있었던 걸까? 하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다. 영국에는 코끼리와 관련된 속담이 내려오는 것 같은데, 코끼리가 기억이 좋다는 게 그 내용인가 보다. 우리나라 속담에 '코가 개코다' 이런 것과 비슷한 류 같은데, 아마도 오랫동안 인도 지방을 식민지로 다스렸던 나라였기에 나온 이야기인가보다.

 

여기서 코끼리란 아리아드네 올리버 부인. 푸아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소설 첫부분부터 끝까지 전부 아리아드네가 책임지며 푸아로는 약간의 도움만 줄 뿐이다. 아리아드네의 캐릭터 때문인지 그녀가 등장하면 늘 소설의 톤이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이분 이름을 들어본 것 같아요."

실리아는 주저하는 어조로 말했다.

에르퀼 푸아로는 '제 이름을 안 달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라고 단호히 말하고 싶은 욕구를 힘겹게 참았다. 과거에야 그 말이 사실이었겠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았다. 에르퀼 푸아로의 이름을 들어보고 그를 알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 교회의 묘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2년에 나온 소설. 위키피디아의 크리스티 소설 목록에 따르면 이 소설은 마지막으로부터 네 번째 소설이다. 중간 중간 다른 필명을 가지고 소설을 내기도 했고, 단편도 냈지만, 어쨌든 장편의 발표 시기를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가 또 한 번 느껴지는 부분이다. 워낙 오랫동안 글을 쓰는 작가이다보니 어느 정도 패턴이 반복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소설은 1942년에 출판된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유사하다. 이미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사망한 어머니의 누명을 벗겨달라며 찾아온 딸의 이야기가, 여기에서는 아들의 결혼 상대의 부모가 의문사한 것에 대해 알려달라며 찾아온 한 어머니의 이야기로 치환된다.

 

사실 소설 속 사건 경위에 대해서는 빨리 눈치챌 수 있는 편이다. 네 개씩이나 되는 가발,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크리스티의 소설답지 않게 쉽게 풀려버린다. 더구나 당시 어렸던 딸이 사건 전후로 외국에서 생활해 정확한 앞뒤 사정을 알기 힘들다는 것과, 이미 십여년 전 끝나버린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계기가 그 딸의 결혼이라는 것, 또 그 딸의 어머니가 자신의 여자 형제를 보호하고자 했던 마음이 이 사건의 뒤에 있으며 그 이유는 다른 한 자매의 소중한 부분을 망가뜨렸다는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까지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너무나 흡사하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작가의 나이가 들어서 예리함이 둔해진 탓일까. 이보다 뒤에 나온 <커튼>은 물론 훌륭하지만, 사실 그 작품은 수십 년 전 작가가 젊은 시절 써 놓은 작품을 훨씬 뒤에 출판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소설 전체적으로 팽팽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1970년대에 나온 다른 소설들을 읽어 보면 어떨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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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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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소령님이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죠. 누군가를 본 게 아닌가 싶어요. 소령님의 얼굴이 아주 붉어지더니 그 스냅 사진을 황급히 지갑에 도로 쑤셔 넣고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거든요."

"누구를 보았기에?"

"나도 그것을 아주 많이 생각해 보았답니다. 나는 내 방갈로 밖에 앉아 있었고,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엇어요. 그리고...... 누구를 보았는지 내 오른쪽 어깨 너머를 본 거예요."

 

이 책의 원제는 A Caribbean Mystery이다. 캐리비안의 비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이 활동하는 바로 그 무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다룬 책이다. 

 

"만약 다른 살인 계획이 있었다고 가정해 봐요. 팔그레이브 소령님이 말했던 이야기 기억하시죠? 의심쩍은 상황에서 아내가 죽은 남자 이야기요. 얼마간 시간이 지난 다음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서 또 한 번의 살인이 일어났어요. 남자의 이름은 달랐지만 아내는 똑같은 방식으로 죽었고, 그 이야기를 한 의사는 그가 이름은 바꾸었어도 같은 남자라는 것을 알아보았지요. 자, 그러면 이 살인자가 그런 일을 습관적으로 하는 살인자일 수도 있다는 건 아시겠죠?"

"욕조 속의 신부 사건의 스미스 같은 자들 이야기군. 그래요."

"내가 이해하는 한은, 그리고 내가 듣고 읽은 것에 따르면 이런 사악한 일을 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간 사람은 슬프게도 기가 살아난답니다. 그는 그런 일이 쉽다고, 또 자기가 영리하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 일을 되풀이해요. 그리고 결국은 말씀하신 욕조 속의 신부 사건의 스미스처럼 그것이 습관이 된답니다. 매번 다른 장소에서 이름을 바꿔 가며 일을 벌이지요. 하지만 범죄 자체는 아주 비슷해요.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당신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렇지?"

라피엘 씨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마플 양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만약 상황이 그런 데다가 이...... 이 사람이 여기서 또 한 명의 아내를 없애기 위한 살인 준비를 전부 마쳤다면, 그리고 이런 범죄가 서너 번 벌어졌다면 소령님의 이야기가 문제가 되죠. 살인자는 조금이라도 비슷하다는 소리가 나오면 곤란해질 테니까요. 스미스도 그래서 붙잡혔잖아요. 기억하시죠? 범죄 상황이 어떤 사람의 주의를 끌었고, 그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건의 신문 스크랩과 비교했지요. 이제 아시겠죠? 만약 이 사악한 사람이 범죄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곧 저지를 참이었다면, 팔그레이브 소령님이 그 이야기를 말하고 스냅 사진을 여기저기 보여 주면서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마플 양은 지금 휴양을 간 상태다. 다정하고 능력 있는 조카 레이먼드의 도움으로 망중한을 즐기는 중이다. 지루할 정도로 한가로운 이 곳에서도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음, 《타임》에서 내 부고를 읽고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사람을 런던에서 대략 대여섯 명은 추릴 수 있지. 하지만 그들은 내 죽음을 앞당기려고 무슨 짓을 저지르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을 거요.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겠소? 나는 조만간 죽을 텐데. 사실 그 버러지...... 그 악당들은 내가 이렇게 오래 버티는 걸 보고 무척 놀랄 거요. 의사들도 놀라고."

"당신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하기 때문이에요."

마플 양이 말했다.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라피엘 씨가 말했다. 마플 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삶은 잃어버릴 것 같을 때 더 살 가치가 있고, 흥미로 가득 차게 되지요.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 그렇답니다. 젊고 강하고 건강할 때, 남은 시간이 당신 앞에 길게 뻗어 있을 때는 사는 것이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아요. 사랑의 절망 떄문에, 때로는 과도한 불안과 초조 때문에 자살하는 건 거의가 젊은 사람들이죠. 나이 든 사람들은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흥미로운지 알고 있답니다."

라피엘 씨가 코웃음을 쳤다.

"하! 한 쌍의 늙은이들이 잘도 떠들어 대고 있구먼."

 

휴양지에서 만난 라피엘 씨와 마플 양의 대화다. 이 부분이 재미있었다. 1964년에 나온 이 소설은 크리스티에게도 말년에 쓴 소설이지만, 소설 속 마플 양 입장에서도 상당한 노년 시기이다. 두 노인의 날카로운 대화가 재미있었다.

 

"어떤 여자들은 불행한 사연을 가진 남자에게 쉽게 빠져 버리지.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이해해 주는 여자뿐이라고 빋고 일단 자기와 결혼하면 기운을 내고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다오. 그렇지만 그런 남자들은 절대로 그러지 못하지. 어쨌건 그녀의 성에 안 차는 남편은 다행히 죽었소. 어느 날 밤 파티에서 너무 술을 많이 마시소 버스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하더군. 에스터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딸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이전에 하던 비서 일을 다시 해야 했소, 나하고는 5년을 같이 지냈지.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해 두었소. 내가 죽어 봤자 유산 같은 건 바랄 수도 없을 거라고.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주 많은 월급을 주었고, 매년 그 월급의 4분의 1씩 올려 주고 있소. 아무리 품위 있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이란 믿을 것이 아니라오....... 그래서 나는 에스터에게 분명히 말해 두었소. 내가 죽어 봣자 그녀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이오."

 

라피엘 씨의 성격이 어떤지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쓸데없이 사건을 꼬지 않고 명확하게 집중하게 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여기서 모호하게 흘렀더라면, 실재의 사건은 다른 관점에서 존재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건인 것처럼 보이는, 그런 익숙한 패턴으로 흘러갔을 텐데, 애시당초 이 부분에서 차단해버린다. 즉, 초반의 팔그레이브스 경의 살인이 맥거핀이 아니라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마플 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가 든 여자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보고 쉴 만한 한숨이었다. 에스터에게 부족한 것은 마플 양의 생활 반경에서는 아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나한테는 그다지 매력이 없어.', '섹시하지 않아.', '눈매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걸.' 금발 머리, 멋진 피부색, 밤색 눈, 훌륭한 몸매, 쾌활한 미소를 소유하고 있지만 남자가 거리에서 머리를 돌리게끔 만드는 그 무엇이 없었다.

"그녀는 재혼해야 해요."

마플 양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물론 다시 해야지. 그녀는 아주 좋은 아내가 될거야."

 

이 부분은 나중에 복선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대체로 크리스티 소설에서는 이렇게 언급되는 여주인공은 꼭 로맨스가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는 그 익숙한 공식이 배반된다.

 

"누가 이런 것을 그녀에게 주었지요?"

"뉴욕의 의사예요. 몰리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거든요."

"알겠습니다. 최근 우리 의사들이 이런 약을 마음대로 내준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잠을 못 자는 젊은 여자에게 양을 세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지요. 아니면 일어나서 비스킷을 먹거나 편지를 한두 통 써 보고 도로 침대로 가라고도 하지 않죠. 요즘 사람들은 당장 치료하는 법을 요구하니까요. 때로 나는 우리가 그런 치료법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유감이라오. 인생에서 어떤 일들은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말이오. 우는 것을 그치게 하려고 애기 입에 고무 젖꼭지를 밀어 넣는 거야 괜찮지요. 하지만 그런 걸 일생 동안 계속할 수는 없잖습니까."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마지막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의 로맨스로 성급히 마무리되거나, 살인자의 퇴장이나 마지막 변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매력적이며, 어쩌면 크리스티 소설 전체에서 손꼽힐 만한 캐릭터 중 하나로 마무리된다.

 

작별을 고할 시간이 되었을 대 에스터 월터스만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플 양은 억지로 작별 인사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라피엘 씨가 마지막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앗다.

"아베 카이사르, 노스 모리투리 테 살루타무스.(황제 만세, 죽을 운명의 우리들이 폐하께 경의를 표합니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들이 시합 전에 했던 말-옮긴이)."

"제가 라틴 어를 잘 몰라서 유감이네요."

"하지만 이 말은 무슨 뜻인지 알지요?"

"예."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뻤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활주로 위로 걸어가 비행기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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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들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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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마시 양, 이번 사건은 아주 특이합니다. 제가 올바르게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요 사항들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틀렸다면 정정해 주세요. 펩마시 양은 오늘 만나기로 한 방문객도 없고, 보험에 관한 문의를 하신 적도 없으며 보험회사에서 오늘 찾아뵙겠다는 편지를 받은 적도 없습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펩마시 양은 속기사를 부를 이유가 없었고, 캐번디시 협회에 전화를 걸지도, 3시까지 사람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것 또한 맞아요."

"대략 1시 30분쯤 집을 나갈 당시 이 응접실에는 뻐꾸기시계와 괘종시계 두 개만 있었습니다. 다른 시계는 없었고요."

 

이 책은 1963년에 나온 소설이다. 그야말로 크리스티 말년의 소설로, 푸아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책의 절반쯤에 가서야 등장하며, 오히려 경찰인 하드캐슬과 그의 친구이자 정식 경찰은 아니지만 정부를 위한 비밀스런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램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하드캐슬은 마치 푸아로의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재프 경감에 대응할 수 있겠고, 푸아로에게 이런 저런 정보를 물어다주는 램은 마치 헤이스팅스에 대응할 수 있겠다. 시간이 흘렀으니, 재프 경감은 아마도 은퇴했을지도 모른다. 남미로 이주한 헤이스팅스는 한동안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푸아로의 마지막 사건 <커튼>에서야 등장한다. 그러나 역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유머가 없지는 않지만 재프 경감에 비해 하드캐슬은 좀 더 진지한 캐릭터이며, 헛발질을 날리던 헤이스팅스에 비해 램은 매우 영특하다. 1930년대와 1960년대가 같을 수는 없겠지. 캐릭터가 더 신중하며 예리해지고, 거기에 따라서 소설 또한 더 냉정해졌다고 할까.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모피와 보석, 머리 장식과 오트구튀르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정작 그 여자 본인의 모습은 절대 보지 못해! 그래서 나 자신에게 말했지....... 그리고 내 친구 콜린에게도 말했지....... 이번 살인 사건은 지극히 간단하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여러 가지 화려한 장치를 설치한 거라고. 내가 그러지 않았던가?"

 

돌아다니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서도 푸아로는 역시 사건의 핵심을 짚어낸다. 의문의 시계, 신원을 알 수 없는 피해자, 눈 먼 노부인, 젊은 속기사....... 그러나 복잡해보이는 사건이야말로 실은 단순하다는 푸아로의 말이 적중한다.

 

"그 아이 사진이 있어요...... 아기 때 찍은......."

그녀가 서랍을 열자 난 그 뒤에 가 섰다. 자동 권총이 아니었다. 작고 치명적인 칼이었다.......

난 그녀의 손을 붙잡고 칼을 빼앗았다.

"제가 좀 순할지는 몰라도 바보는 아닙니다."

그러자 펩마시 양이 손으로 의자를 잡고 앉았다.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제안은 사양하겠어요.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난 여기 머물 거예요....... 그들이 올 때까지. 기회란 항상 있는 법이죠....... 감옥에서도."

"교화 말씀인가요?"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며, 동시에 서로를 이해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는 일을 그만 뒀습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가려고요....... 해양생물학이오. 호주 대학에 자리가 나서요."

"현명한 선택 같군요. 당신에게는 이 직업에 필요한 자질이 없어요. 당신은 마치 로즈마리의 아빠 같아요. 그 사람은 '부드러움을 경계하라.'는 레닌의 격언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는 에르퀼 푸아로가 한 말을 떠올렸다.

"저는 인간이라는 데 만족합니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의견이 다르다는 확신을 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복잡해 보이지만 일견 단순한 사건이었다는 것은, 책을 다 읽고 난 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크리스티 초기 소설에서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명료하면서도 모든 주인공들이 정확한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사건의 대단원을 마치는, 그런 즐거움이 있다. 영화로 치자면, 웰메이드 상업영화라고 할까, 매끈하게 잘 만들어졌다는 그런 느낌. 후기로 올 수록 캐릭터는 더 복잡해지고, 사건은 더 지저분해진다. '이런 사건을 만들어내다니!' 혹은 '역시 재미있는 소설이야!'하고 이야기의 참신성에 감탄하기보다는, 너무나 실제적인,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건들,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이 다뤄진다. 아마 작가 개인의 취향이나 관점의 변화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나이가 들면서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닐까도 생각한다. 젊은 시절 거대하고 화려한 부분을 동경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소박하고 단순해진다고 할까. 아마도 크리스티의 대부분의 대표작들이 초반이나 중반에 몰려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 기존의 크리스티 소설과는 좀 다른 부분이었다. 살해 사건과는 무관하게 램이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는 소설 막바지의 부분이 좋았고, 또 이런 거대한 사건이 직업적으로 소설을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속기사에 의해 꾸며졌다는 내용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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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긴티 부인의 죽음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회성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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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52년 소설이다. 크리스티가 가장 대중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을 쓸 무렵이 이 때인 것 같다. 푸아로와 올리버 부인이 함께 등장하는데, 여기서 올리버 부인은 푸아로의 오랜 친구로 설정된다. 아리아드네 올리버는 누가 보아도 크리스티 자신이다. 아마도 수십 편의 추리 소설을 쓰면서 작가 본인도 이래저래 지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작품 활동 자체에 대한 것도 있겠고, 본인이 쓴 소설과 캐릭터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그 때문에 피곤한 일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리아드네는 크리스티에게 하나의 쉼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그녀의 입으로 직접 말을 하는 장면은 좀 더 유심히 보게 된다. 단순히 등장인물의 생각이 아니라 크리스티 본인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작가의 즐거움은 독자에게도 전달되는 것일까. 만약 이 소설이 온전히 푸아로에게 떨어진 사건이었다면 재미는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 소설의 별 한개는 아리아드네의 몫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별 반 개 정도는 이 책에도 등장하는 '에그녹'에 주고 싶다. 달걀과 우유를 섞은 술이라고 설명이 나오는데, 등장할 때마다 맛이 궁금해지면서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조금 지나친 추론을 통해 상상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오. 몽 셰르 스펜스(친애하는 스펜스), 만약 맥긴티 부인이 그냥 평범한 파출부라면 범인은 틀림없이 비범한 자일 거요. 그래, 이렇게 생각하니 확실해지는군. 이번 사건에서 우리는 피살자가 아니라 범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오. 그것이 대부분의 범죄와 다른 점이지. 대개 피살자의 성격에서 사건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소. 그래서 나는 보통 아무 말이 없는 피살자에게 관심을 갖는다오. 피살자의 애정 관계나 원한 관계, 행동 등에 대해 말이오. 희생된 피살자에 대해 깊은 것까지 알아 가다 보면 나중에는 피살자가 말을 하게 된다오. 죽은 자가 입술을 움직여 어떤 이름을 알려 주는 거지. 우리가 정말 알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이름을.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것과는 정반대란 말이지. 우리는 베일에 쌓인 누군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누군가를 말이오. 맥긴티 부인이 어떻게 해서 죽었지? 죽은 이유는 뭘까? 그 해답은 맥긴티 부인의 삶을 조사해 봤자 얻을 수 없을 거요. 해답을 얻으려면 살인자의 특성을 알아봐야 하오."

 

맥긴티 부인이 사망했다. 유산도 없고, 원한 관계도 없고, 지극히 평범한 노부인. 그래서 더 갈피를 잡기 어려운 사건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어요. 어머니는 과거에 집착하는 분이거든요."

"원래 그런 사람들이 있죠."

푸아로가 맞장구를 치면서 조금 전 갔던 방의 모습을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렸다. 웨더비 부인의 방에 있는 책상 서랍이 반쯤 열려 있었다. 서랍 속에는 비단으로 만든 바늘꽂이, 살이 부러진 부채, 은제 커피포트, 오래된 잡지 몇 권 등등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마도 물건이 너무 많아 서랍을 닫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푸아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물건들을 소중히 모아 두곤 하죠. 댄스 차례표, 부채, 먼저 세상 떠난 친구들 사진, 심지어 메뉴판이나 극장표까지 간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옛 추억들이 되살아나니까요."

"그런 것 같아요.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요. 저는 어떤 물건이든 오랫동안 간직하는 법이 없어요."

"당신은 미래 지향적인 분이군요. 과거는 결코 되돌아보지 않는."

 

단순히 등장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 같지만, 이 부분은 사실 작품 전체의 모티브와 관련이 있다.

 

집 밖으로 나온 푸아로가 대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로빈 업워드의 밝은 테너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아리아드네. 다 좋다고요. 하지만 그 콧수염 하며 차림새를 좀 보세요. 그 사람을 보고 누가 진지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진심으로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푸아로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지!

 

이 부분은 웃음이 나왔다. 작가도 이 부분은 즐거워하며 쓰지 않았을까 싶다.

 

스펜스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막막하군요. 우리가 이 사람들의 과거사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전쟁은 여러 가지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죠. 각종 기록들이 멸실되었고, 그러다 보니 남의 신분증을 이용해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기회가 생긴 겁니다. 특히 시신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동란 뒤에는 그런 일들이 더욱 비일비재했죠."

 

이 소설이 1952년에 나왔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확실히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언제 나왔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 때문이 아니라 당시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 떄문일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른다섯, 그 이상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그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써 온 지 벌써 30년이나 됐어요. 그런데 첫 작품에서 이미 그는 서른다섯이었다고요."

"하지만 아리아드네. 만약 그가 예순이라면 그와 여자 사이에 성적인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없어요. 그 여자 이름이 뭐더라? 잉그리드! 둘 사이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면 남자는 자연히 몹쓸 노인네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그러니까 그는 반드시 서른다섯이어야만 해요."

로빈이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스벤 예르손이 될 수 없어요. 그냥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노르웨이 출신의 한 청년이라고 해두자고요."

"하지만 아리아드네, 이 연극의 주인공은 스벤 예르손이에요. 엄청나게 많은 독자들이 스벤 예르손을 사모하는 만큼, 이번 연극을 보러 올 사람들도 모두 스벤 예르손의 팬들이란 말입니다. 그벤 예르손이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요."

"그렇지만 제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노르웨이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청년을 만들어 놓고, 그를 무조건 스벤 예르손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봐요, 아리아드네, 제가 이미 설명 드렸잖습니까? 이건 책이 아니라 연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객들을 홀리는 마법을 부려야 한다고요. 만약 스벤 예르손과 이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다! 캐런! 그러니까 스벤 예르손과 캐런 사이에 성적 긴장감을 불어넣기만 하면, 서로 대립하는 가우데 어마어마한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이......."

"스벤 예르손은 원래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라고요."

올리버 부인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렇더라도 그를 동성애자로 만들 수는 없잖습니까? 특히 이런 연극에서는 더욱 불가능해요. 우리 작품은 심각하고 칙칙한 내용이 아니에요. 살인 사건을 둘러싼 숨 막힌느 스릴과 신선한 바깥 공기 같은 재미를 주어야 한다고요."

 

이 부분은 확실히 크리스티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작품은 상당수가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재닛 그룸이 불평을 좀 하더라고요. 하지만 별로 이상할 것 없잖아요? 재닛도 젊은 나이가 아닌 데다 동풍이 불 때는 류머티즘이 지독하게 도지거든요. 하지만 상류사회 사람들은 관절염에만 걸려도 휠체어다 뭐다 하며 야단법석을 떨죠. 저라면 제 두 다리를 사용하지 않는 짓은 하지 않겠어요. 암, 그러고말고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가벼운 동상에만 걸려도 의사에게 달려간다니까요.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거죠. 건강 관련 사업이 너무 발달했어요. 자신의 몸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고민해 봤자 이로울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에요."

 

전쟁 직후 영국은 여러 부분에서 법률을 개정하였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로 미루어보건대 세금을 더 많이 거두었고, 외국인의 고용이 늘었으며, 경제 용어로 치자면 이른바 '큰정부'를 지향하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올리버 부인이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왜 그런 혐오스러운 남자를 만들어 냈는지 나도 모른다고요. 아마 내가 미쳤었나 보죠! 핀란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하필 그를 핀란드 인으로 설정했는지, 왜 채식주의자라고 했는지, 왜 그런 바보 같은 매너리즘에 빠진 인물을 만들었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한번 만들어 보란 말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걸 좋아한다 싶으면 계속 그렇게 밀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당신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빌어먹을 스벤 예르손 같은 인간이 당신을 평생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요. 심지어 사람들은 글과 말로 당신이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들어 대겠죠. 흥, 그를 좋아한다고? 만약 내가 현실에서 풀만 먹어 비쩍 마르고 키만 껑충한 그런 남자를 만난다면, 지금껏 내가 고안해 낸 그 어떤 것보다 더 잔인한 수법으로 그를 죽이고 말 거예요."

로빈 업워드가 존경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 그거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예요! 현실의 스벤 예르손을 작가인 당신이 살해한다....... 당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쓰면 멋지겠는데요. 사후에 출판되는 것으로 하고요."

"말도 안 돼! 그 원고료는 어쩌고요? 살인 사건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내가 살아 있을 때 받고 싶단 말이에요."

"아, 그러신가요?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면박을 당한 희곡작가가 방 안을 서성거렸다.

 

이 부분은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아마 실제로 크리스티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벨기에 출신의 다소 독특한 탐정을 설정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푸아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인가. 작가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라는 것은 때로는 업보처럼 느껴지기도 하나보다.

 

"네? 뭐라고요?"

올리버 부인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되물었다.

그녀는 잠시 그리운 집을 꿈꾸고 있었다. 이국적인 새와 나무들이 그려진 벽, 소나무로 만든 튼튼한 책상, 그녀가 아끼는 타자기, 향기로운 블랙커피, 곳곳에 놓인 사과....... 그 얼마나 거룩하고 고독한 행복이란 말인가. 작가가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성채로부터 벗어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본래 작가들이란 수줍음 많고 사교성 없는 인간들로서, 스스로 친구를 만들어 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사회성을 벌충하는 법이었다.

 

아마 이 책을 쓸 때의 크리스티는 인생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때가 아닐까 싶다. 아리아드네의 등장 비중이 높은 것도 그렇지만, 전체적인 소설 톤이 유머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힘들수록 스스로 방어막을 세우고 뒤로 숨기 마련인데, 자신있게 앞에 등장하여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작가의 인생에서 이 때가 가장 평화롭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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