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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긴티 부인의 죽음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회성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평점 :
이 소설은 1952년 소설이다. 크리스티가 가장 대중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을 쓸 무렵이 이 때인 것 같다. 푸아로와 올리버 부인이 함께 등장하는데, 여기서 올리버 부인은 푸아로의 오랜 친구로 설정된다. 아리아드네 올리버는 누가 보아도 크리스티 자신이다. 아마도 수십 편의 추리 소설을 쓰면서 작가 본인도 이래저래 지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작품 활동 자체에 대한 것도 있겠고, 본인이 쓴 소설과 캐릭터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그 때문에 피곤한 일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리아드네는 크리스티에게 하나의 쉼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그녀의 입으로 직접 말을 하는 장면은 좀 더 유심히 보게 된다. 단순히 등장인물의 생각이 아니라 크리스티 본인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작가의 즐거움은 독자에게도 전달되는 것일까. 만약 이 소설이 온전히 푸아로에게 떨어진 사건이었다면 재미는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 소설의 별 한개는 아리아드네의 몫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별 반 개 정도는 이 책에도 등장하는 '에그녹'에 주고 싶다. 달걀과 우유를 섞은 술이라고 설명이 나오는데, 등장할 때마다 맛이 궁금해지면서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조금 지나친 추론을 통해 상상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오. 몽 셰르 스펜스(친애하는 스펜스), 만약 맥긴티 부인이 그냥 평범한 파출부라면 범인은 틀림없이 비범한 자일 거요. 그래, 이렇게 생각하니 확실해지는군. 이번 사건에서 우리는 피살자가 아니라 범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오. 그것이 대부분의 범죄와 다른 점이지. 대개 피살자의 성격에서 사건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소. 그래서 나는 보통 아무 말이 없는 피살자에게 관심을 갖는다오. 피살자의 애정 관계나 원한 관계, 행동 등에 대해 말이오. 희생된 피살자에 대해 깊은 것까지 알아 가다 보면 나중에는 피살자가 말을 하게 된다오. 죽은 자가 입술을 움직여 어떤 이름을 알려 주는 거지. 우리가 정말 알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이름을.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것과는 정반대란 말이지. 우리는 베일에 쌓인 누군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누군가를 말이오. 맥긴티 부인이 어떻게 해서 죽었지? 죽은 이유는 뭘까? 그 해답은 맥긴티 부인의 삶을 조사해 봤자 얻을 수 없을 거요. 해답을 얻으려면 살인자의 특성을 알아봐야 하오."
맥긴티 부인이 사망했다. 유산도 없고, 원한 관계도 없고, 지극히 평범한 노부인. 그래서 더 갈피를 잡기 어려운 사건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어요. 어머니는 과거에 집착하는 분이거든요."
"원래 그런 사람들이 있죠."
푸아로가 맞장구를 치면서 조금 전 갔던 방의 모습을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렸다. 웨더비 부인의 방에 있는 책상 서랍이 반쯤 열려 있었다. 서랍 속에는 비단으로 만든 바늘꽂이, 살이 부러진 부채, 은제 커피포트, 오래된 잡지 몇 권 등등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마도 물건이 너무 많아 서랍을 닫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푸아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물건들을 소중히 모아 두곤 하죠. 댄스 차례표, 부채, 먼저 세상 떠난 친구들 사진, 심지어 메뉴판이나 극장표까지 간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옛 추억들이 되살아나니까요."
"그런 것 같아요.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요. 저는 어떤 물건이든 오랫동안 간직하는 법이 없어요."
"당신은 미래 지향적인 분이군요. 과거는 결코 되돌아보지 않는."
단순히 등장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 같지만, 이 부분은 사실 작품 전체의 모티브와 관련이 있다.
집 밖으로 나온 푸아로가 대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로빈 업워드의 밝은 테너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아리아드네. 다 좋다고요. 하지만 그 콧수염 하며 차림새를 좀 보세요. 그 사람을 보고 누가 진지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진심으로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푸아로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지!
이 부분은 웃음이 나왔다. 작가도 이 부분은 즐거워하며 쓰지 않았을까 싶다.
스펜스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막막하군요. 우리가 이 사람들의 과거사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전쟁은 여러 가지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죠. 각종 기록들이 멸실되었고, 그러다 보니 남의 신분증을 이용해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기회가 생긴 겁니다. 특히 시신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동란 뒤에는 그런 일들이 더욱 비일비재했죠."
이 소설이 1952년에 나왔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확실히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언제 나왔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 때문이 아니라 당시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 떄문일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른다섯, 그 이상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그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써 온 지 벌써 30년이나 됐어요. 그런데 첫 작품에서 이미 그는 서른다섯이었다고요."
"하지만 아리아드네. 만약 그가 예순이라면 그와 여자 사이에 성적인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없어요. 그 여자 이름이 뭐더라? 잉그리드! 둘 사이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면 남자는 자연히 몹쓸 노인네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그러니까 그는 반드시 서른다섯이어야만 해요."
로빈이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스벤 예르손이 될 수 없어요. 그냥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노르웨이 출신의 한 청년이라고 해두자고요."
"하지만 아리아드네, 이 연극의 주인공은 스벤 예르손이에요. 엄청나게 많은 독자들이 스벤 예르손을 사모하는 만큼, 이번 연극을 보러 올 사람들도 모두 스벤 예르손의 팬들이란 말입니다. 그벤 예르손이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요."
"그렇지만 제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노르웨이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청년을 만들어 놓고, 그를 무조건 스벤 예르손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봐요, 아리아드네, 제가 이미 설명 드렸잖습니까? 이건 책이 아니라 연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객들을 홀리는 마법을 부려야 한다고요. 만약 스벤 예르손과 이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다! 캐런! 그러니까 스벤 예르손과 캐런 사이에 성적 긴장감을 불어넣기만 하면, 서로 대립하는 가우데 어마어마한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이......."
"스벤 예르손은 원래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라고요."
올리버 부인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렇더라도 그를 동성애자로 만들 수는 없잖습니까? 특히 이런 연극에서는 더욱 불가능해요. 우리 작품은 심각하고 칙칙한 내용이 아니에요. 살인 사건을 둘러싼 숨 막힌느 스릴과 신선한 바깥 공기 같은 재미를 주어야 한다고요."
이 부분은 확실히 크리스티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작품은 상당수가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재닛 그룸이 불평을 좀 하더라고요. 하지만 별로 이상할 것 없잖아요? 재닛도 젊은 나이가 아닌 데다 동풍이 불 때는 류머티즘이 지독하게 도지거든요. 하지만 상류사회 사람들은 관절염에만 걸려도 휠체어다 뭐다 하며 야단법석을 떨죠. 저라면 제 두 다리를 사용하지 않는 짓은 하지 않겠어요. 암, 그러고말고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가벼운 동상에만 걸려도 의사에게 달려간다니까요.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거죠. 건강 관련 사업이 너무 발달했어요. 자신의 몸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고민해 봤자 이로울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에요."
전쟁 직후 영국은 여러 부분에서 법률을 개정하였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로 미루어보건대 세금을 더 많이 거두었고, 외국인의 고용이 늘었으며, 경제 용어로 치자면 이른바 '큰정부'를 지향하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올리버 부인이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왜 그런 혐오스러운 남자를 만들어 냈는지 나도 모른다고요. 아마 내가 미쳤었나 보죠! 핀란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하필 그를 핀란드 인으로 설정했는지, 왜 채식주의자라고 했는지, 왜 그런 바보 같은 매너리즘에 빠진 인물을 만들었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한번 만들어 보란 말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걸 좋아한다 싶으면 계속 그렇게 밀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당신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빌어먹을 스벤 예르손 같은 인간이 당신을 평생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요. 심지어 사람들은 글과 말로 당신이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들어 대겠죠. 흥, 그를 좋아한다고? 만약 내가 현실에서 풀만 먹어 비쩍 마르고 키만 껑충한 그런 남자를 만난다면, 지금껏 내가 고안해 낸 그 어떤 것보다 더 잔인한 수법으로 그를 죽이고 말 거예요."
로빈 업워드가 존경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 그거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예요! 현실의 스벤 예르손을 작가인 당신이 살해한다....... 당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쓰면 멋지겠는데요. 사후에 출판되는 것으로 하고요."
"말도 안 돼! 그 원고료는 어쩌고요? 살인 사건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내가 살아 있을 때 받고 싶단 말이에요."
"아, 그러신가요?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면박을 당한 희곡작가가 방 안을 서성거렸다.
이 부분은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아마 실제로 크리스티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벨기에 출신의 다소 독특한 탐정을 설정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푸아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인가. 작가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라는 것은 때로는 업보처럼 느껴지기도 하나보다.
"네? 뭐라고요?"
올리버 부인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되물었다.
그녀는 잠시 그리운 집을 꿈꾸고 있었다. 이국적인 새와 나무들이 그려진 벽, 소나무로 만든 튼튼한 책상, 그녀가 아끼는 타자기, 향기로운 블랙커피, 곳곳에 놓인 사과....... 그 얼마나 거룩하고 고독한 행복이란 말인가. 작가가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성채로부터 벗어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본래 작가들이란 수줍음 많고 사교성 없는 인간들로서, 스스로 친구를 만들어 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사회성을 벌충하는 법이었다.
아마 이 책을 쓸 때의 크리스티는 인생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때가 아닐까 싶다. 아리아드네의 등장 비중이 높은 것도 그렇지만, 전체적인 소설 톤이 유머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힘들수록 스스로 방어막을 세우고 뒤로 숨기 마련인데, 자신있게 앞에 등장하여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작가의 인생에서 이 때가 가장 평화롭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