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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들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평점 :
"펩마시 양, 이번 사건은 아주 특이합니다. 제가 올바르게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요 사항들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틀렸다면 정정해 주세요. 펩마시 양은 오늘 만나기로 한 방문객도 없고, 보험에 관한 문의를 하신 적도 없으며 보험회사에서 오늘 찾아뵙겠다는 편지를 받은 적도 없습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펩마시 양은 속기사를 부를 이유가 없었고, 캐번디시 협회에 전화를 걸지도, 3시까지 사람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것 또한 맞아요."
"대략 1시 30분쯤 집을 나갈 당시 이 응접실에는 뻐꾸기시계와 괘종시계 두 개만 있었습니다. 다른 시계는 없었고요."
이 책은 1963년에 나온 소설이다. 그야말로 크리스티 말년의 소설로, 푸아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책의 절반쯤에 가서야 등장하며, 오히려 경찰인 하드캐슬과 그의 친구이자 정식 경찰은 아니지만 정부를 위한 비밀스런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램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하드캐슬은 마치 푸아로의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재프 경감에 대응할 수 있겠고, 푸아로에게 이런 저런 정보를 물어다주는 램은 마치 헤이스팅스에 대응할 수 있겠다. 시간이 흘렀으니, 재프 경감은 아마도 은퇴했을지도 모른다. 남미로 이주한 헤이스팅스는 한동안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푸아로의 마지막 사건 <커튼>에서야 등장한다. 그러나 역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유머가 없지는 않지만 재프 경감에 비해 하드캐슬은 좀 더 진지한 캐릭터이며, 헛발질을 날리던 헤이스팅스에 비해 램은 매우 영특하다. 1930년대와 1960년대가 같을 수는 없겠지. 캐릭터가 더 신중하며 예리해지고, 거기에 따라서 소설 또한 더 냉정해졌다고 할까.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모피와 보석, 머리 장식과 오트구튀르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정작 그 여자 본인의 모습은 절대 보지 못해! 그래서 나 자신에게 말했지....... 그리고 내 친구 콜린에게도 말했지....... 이번 살인 사건은 지극히 간단하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여러 가지 화려한 장치를 설치한 거라고. 내가 그러지 않았던가?"
돌아다니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서도 푸아로는 역시 사건의 핵심을 짚어낸다. 의문의 시계, 신원을 알 수 없는 피해자, 눈 먼 노부인, 젊은 속기사....... 그러나 복잡해보이는 사건이야말로 실은 단순하다는 푸아로의 말이 적중한다.
"그 아이 사진이 있어요...... 아기 때 찍은......."
그녀가 서랍을 열자 난 그 뒤에 가 섰다. 자동 권총이 아니었다. 작고 치명적인 칼이었다.......
난 그녀의 손을 붙잡고 칼을 빼앗았다.
"제가 좀 순할지는 몰라도 바보는 아닙니다."
그러자 펩마시 양이 손으로 의자를 잡고 앉았다.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제안은 사양하겠어요.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난 여기 머물 거예요....... 그들이 올 때까지. 기회란 항상 있는 법이죠....... 감옥에서도."
"교화 말씀인가요?"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며, 동시에 서로를 이해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는 일을 그만 뒀습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가려고요....... 해양생물학이오. 호주 대학에 자리가 나서요."
"현명한 선택 같군요. 당신에게는 이 직업에 필요한 자질이 없어요. 당신은 마치 로즈마리의 아빠 같아요. 그 사람은 '부드러움을 경계하라.'는 레닌의 격언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는 에르퀼 푸아로가 한 말을 떠올렸다.
"저는 인간이라는 데 만족합니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의견이 다르다는 확신을 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복잡해 보이지만 일견 단순한 사건이었다는 것은, 책을 다 읽고 난 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크리스티 초기 소설에서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명료하면서도 모든 주인공들이 정확한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사건의 대단원을 마치는, 그런 즐거움이 있다. 영화로 치자면, 웰메이드 상업영화라고 할까, 매끈하게 잘 만들어졌다는 그런 느낌. 후기로 올 수록 캐릭터는 더 복잡해지고, 사건은 더 지저분해진다. '이런 사건을 만들어내다니!' 혹은 '역시 재미있는 소설이야!'하고 이야기의 참신성에 감탄하기보다는, 너무나 실제적인,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건들,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이 다뤄진다. 아마 작가 개인의 취향이나 관점의 변화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나이가 들면서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닐까도 생각한다. 젊은 시절 거대하고 화려한 부분을 동경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소박하고 단순해진다고 할까. 아마도 크리스티의 대부분의 대표작들이 초반이나 중반에 몰려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 기존의 크리스티 소설과는 좀 다른 부분이었다. 살해 사건과는 무관하게 램이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는 소설 막바지의 부분이 좋았고, 또 이런 거대한 사건이 직업적으로 소설을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속기사에 의해 꾸며졌다는 내용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