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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평점 :
"그때 소령님이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죠. 누군가를 본 게 아닌가 싶어요. 소령님의 얼굴이 아주 붉어지더니 그 스냅 사진을 황급히 지갑에 도로 쑤셔 넣고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거든요."
"누구를 보았기에?"
"나도 그것을 아주 많이 생각해 보았답니다. 나는 내 방갈로 밖에 앉아 있었고,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엇어요. 그리고...... 누구를 보았는지 내 오른쪽 어깨 너머를 본 거예요."
이 책의 원제는 A Caribbean Mystery이다. 캐리비안의 비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이 활동하는 바로 그 무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다룬 책이다.
"만약 다른 살인 계획이 있었다고 가정해 봐요. 팔그레이브 소령님이 말했던 이야기 기억하시죠? 의심쩍은 상황에서 아내가 죽은 남자 이야기요. 얼마간 시간이 지난 다음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서 또 한 번의 살인이 일어났어요. 남자의 이름은 달랐지만 아내는 똑같은 방식으로 죽었고, 그 이야기를 한 의사는 그가 이름은 바꾸었어도 같은 남자라는 것을 알아보았지요. 자, 그러면 이 살인자가 그런 일을 습관적으로 하는 살인자일 수도 있다는 건 아시겠죠?"
"욕조 속의 신부 사건의 스미스 같은 자들 이야기군. 그래요."
"내가 이해하는 한은, 그리고 내가 듣고 읽은 것에 따르면 이런 사악한 일을 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간 사람은 슬프게도 기가 살아난답니다. 그는 그런 일이 쉽다고, 또 자기가 영리하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 일을 되풀이해요. 그리고 결국은 말씀하신 욕조 속의 신부 사건의 스미스처럼 그것이 습관이 된답니다. 매번 다른 장소에서 이름을 바꿔 가며 일을 벌이지요. 하지만 범죄 자체는 아주 비슷해요.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당신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렇지?"
라피엘 씨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마플 양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만약 상황이 그런 데다가 이...... 이 사람이 여기서 또 한 명의 아내를 없애기 위한 살인 준비를 전부 마쳤다면, 그리고 이런 범죄가 서너 번 벌어졌다면 소령님의 이야기가 문제가 되죠. 살인자는 조금이라도 비슷하다는 소리가 나오면 곤란해질 테니까요. 스미스도 그래서 붙잡혔잖아요. 기억하시죠? 범죄 상황이 어떤 사람의 주의를 끌었고, 그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건의 신문 스크랩과 비교했지요. 이제 아시겠죠? 만약 이 사악한 사람이 범죄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곧 저지를 참이었다면, 팔그레이브 소령님이 그 이야기를 말하고 스냅 사진을 여기저기 보여 주면서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마플 양은 지금 휴양을 간 상태다. 다정하고 능력 있는 조카 레이먼드의 도움으로 망중한을 즐기는 중이다. 지루할 정도로 한가로운 이 곳에서도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음, 《타임》에서 내 부고를 읽고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사람을 런던에서 대략 대여섯 명은 추릴 수 있지. 하지만 그들은 내 죽음을 앞당기려고 무슨 짓을 저지르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을 거요.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겠소? 나는 조만간 죽을 텐데. 사실 그 버러지...... 그 악당들은 내가 이렇게 오래 버티는 걸 보고 무척 놀랄 거요. 의사들도 놀라고."
"당신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하기 때문이에요."
마플 양이 말했다.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라피엘 씨가 말했다. 마플 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삶은 잃어버릴 것 같을 때 더 살 가치가 있고, 흥미로 가득 차게 되지요.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 그렇답니다. 젊고 강하고 건강할 때, 남은 시간이 당신 앞에 길게 뻗어 있을 때는 사는 것이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아요. 사랑의 절망 떄문에, 때로는 과도한 불안과 초조 때문에 자살하는 건 거의가 젊은 사람들이죠. 나이 든 사람들은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흥미로운지 알고 있답니다."
라피엘 씨가 코웃음을 쳤다.
"하! 한 쌍의 늙은이들이 잘도 떠들어 대고 있구먼."
휴양지에서 만난 라피엘 씨와 마플 양의 대화다. 이 부분이 재미있었다. 1964년에 나온 이 소설은 크리스티에게도 말년에 쓴 소설이지만, 소설 속 마플 양 입장에서도 상당한 노년 시기이다. 두 노인의 날카로운 대화가 재미있었다.
"어떤 여자들은 불행한 사연을 가진 남자에게 쉽게 빠져 버리지.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이해해 주는 여자뿐이라고 빋고 일단 자기와 결혼하면 기운을 내고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다오. 그렇지만 그런 남자들은 절대로 그러지 못하지. 어쨌건 그녀의 성에 안 차는 남편은 다행히 죽었소. 어느 날 밤 파티에서 너무 술을 많이 마시소 버스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하더군. 에스터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딸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이전에 하던 비서 일을 다시 해야 했소, 나하고는 5년을 같이 지냈지.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해 두었소. 내가 죽어 봤자 유산 같은 건 바랄 수도 없을 거라고.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주 많은 월급을 주었고, 매년 그 월급의 4분의 1씩 올려 주고 있소. 아무리 품위 있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이란 믿을 것이 아니라오....... 그래서 나는 에스터에게 분명히 말해 두었소. 내가 죽어 봣자 그녀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이오."
라피엘 씨의 성격이 어떤지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쓸데없이 사건을 꼬지 않고 명확하게 집중하게 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여기서 모호하게 흘렀더라면, 실재의 사건은 다른 관점에서 존재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건인 것처럼 보이는, 그런 익숙한 패턴으로 흘러갔을 텐데, 애시당초 이 부분에서 차단해버린다. 즉, 초반의 팔그레이브스 경의 살인이 맥거핀이 아니라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마플 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가 든 여자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보고 쉴 만한 한숨이었다. 에스터에게 부족한 것은 마플 양의 생활 반경에서는 아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나한테는 그다지 매력이 없어.', '섹시하지 않아.', '눈매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걸.' 금발 머리, 멋진 피부색, 밤색 눈, 훌륭한 몸매, 쾌활한 미소를 소유하고 있지만 남자가 거리에서 머리를 돌리게끔 만드는 그 무엇이 없었다.
"그녀는 재혼해야 해요."
마플 양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물론 다시 해야지. 그녀는 아주 좋은 아내가 될거야."
이 부분은 나중에 복선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대체로 크리스티 소설에서는 이렇게 언급되는 여주인공은 꼭 로맨스가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는 그 익숙한 공식이 배반된다.
"누가 이런 것을 그녀에게 주었지요?"
"뉴욕의 의사예요. 몰리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거든요."
"알겠습니다. 최근 우리 의사들이 이런 약을 마음대로 내준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잠을 못 자는 젊은 여자에게 양을 세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지요. 아니면 일어나서 비스킷을 먹거나 편지를 한두 통 써 보고 도로 침대로 가라고도 하지 않죠. 요즘 사람들은 당장 치료하는 법을 요구하니까요. 때로 나는 우리가 그런 치료법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유감이라오. 인생에서 어떤 일들은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말이오. 우는 것을 그치게 하려고 애기 입에 고무 젖꼭지를 밀어 넣는 거야 괜찮지요. 하지만 그런 걸 일생 동안 계속할 수는 없잖습니까."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마지막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의 로맨스로 성급히 마무리되거나, 살인자의 퇴장이나 마지막 변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매력적이며, 어쩌면 크리스티 소설 전체에서 손꼽힐 만한 캐릭터 중 하나로 마무리된다.
작별을 고할 시간이 되었을 대 에스터 월터스만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플 양은 억지로 작별 인사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라피엘 씨가 마지막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앗다.
"아베 카이사르, 노스 모리투리 테 살루타무스.(황제 만세, 죽을 운명의 우리들이 폐하께 경의를 표합니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들이 시합 전에 했던 말-옮긴이)."
"제가 라틴 어를 잘 몰라서 유감이네요."
"하지만 이 말은 무슨 뜻인지 알지요?"
"예."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뻤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활주로 위로 걸어가 비행기에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