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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기억한다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근희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평점 :
"아리아드네 양은 기억력이 참 좋다니까. 그래서 걔들이 그랬잖아. 하나는 아리아드네 양을 '코끼리 여사'라고 부르고, 또 하나는 '백조 여사'라고 불렀던 집에 놀러오던 남자애 둘 말이우. 그러면 아리아드네 양은 그 남자애를 등에 태우고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 긴 코로 물건을 집어 올리는 시늉을 했어."
"많은 것들을 기억하시는군요. 그렇죠, 유모?"
올리버 부인이 말했다.
"아, 코끼리는 잊지 않는다잖아. 옛날 속담에 말이야."
매첨 부인이 말했다.
<코끼리는 기억한다>니 제목이 참 특이했다. 혹시 <벙어리 목격자>와 같은 작품이 아닐까, 사건 현장에 코끼리가 있었던 걸까? 하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다. 영국에는 코끼리와 관련된 속담이 내려오는 것 같은데, 코끼리가 기억이 좋다는 게 그 내용인가 보다. 우리나라 속담에 '코가 개코다' 이런 것과 비슷한 류 같은데, 아마도 오랫동안 인도 지방을 식민지로 다스렸던 나라였기에 나온 이야기인가보다.
여기서 코끼리란 아리아드네 올리버 부인. 푸아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소설 첫부분부터 끝까지 전부 아리아드네가 책임지며 푸아로는 약간의 도움만 줄 뿐이다. 아리아드네의 캐릭터 때문인지 그녀가 등장하면 늘 소설의 톤이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이분 이름을 들어본 것 같아요."
실리아는 주저하는 어조로 말했다.
에르퀼 푸아로는 '제 이름을 안 달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라고 단호히 말하고 싶은 욕구를 힘겹게 참았다. 과거에야 그 말이 사실이었겠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았다. 에르퀼 푸아로의 이름을 들어보고 그를 알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 교회의 묘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2년에 나온 소설. 위키피디아의 크리스티 소설 목록에 따르면 이 소설은 마지막으로부터 네 번째 소설이다. 중간 중간 다른 필명을 가지고 소설을 내기도 했고, 단편도 냈지만, 어쨌든 장편의 발표 시기를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가 또 한 번 느껴지는 부분이다. 워낙 오랫동안 글을 쓰는 작가이다보니 어느 정도 패턴이 반복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소설은 1942년에 출판된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유사하다. 이미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사망한 어머니의 누명을 벗겨달라며 찾아온 딸의 이야기가, 여기에서는 아들의 결혼 상대의 부모가 의문사한 것에 대해 알려달라며 찾아온 한 어머니의 이야기로 치환된다.
사실 소설 속 사건 경위에 대해서는 빨리 눈치챌 수 있는 편이다. 네 개씩이나 되는 가발,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크리스티의 소설답지 않게 쉽게 풀려버린다. 더구나 당시 어렸던 딸이 사건 전후로 외국에서 생활해 정확한 앞뒤 사정을 알기 힘들다는 것과, 이미 십여년 전 끝나버린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계기가 그 딸의 결혼이라는 것, 또 그 딸의 어머니가 자신의 여자 형제를 보호하고자 했던 마음이 이 사건의 뒤에 있으며 그 이유는 다른 한 자매의 소중한 부분을 망가뜨렸다는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까지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너무나 흡사하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작가의 나이가 들어서 예리함이 둔해진 탓일까. 이보다 뒤에 나온 <커튼>은 물론 훌륭하지만, 사실 그 작품은 수십 년 전 작가가 젊은 시절 써 놓은 작품을 훨씬 뒤에 출판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소설 전체적으로 팽팽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1970년대에 나온 다른 소설들을 읽어 보면 어떨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