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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4 (완전판) - 메소포타미아의 살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이라크와 시리아에 있는
여러 고고학자 친구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의학박사 자일스 라일리의 서언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약 4년 전이다. 내 생각에 이제 상황이 많이 바뀐 만큼 일반인들에게도 이 사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중략) 그래서 나는 이 과업을 맡아 달라고 에이미 레더런 양을 강력히 설득했다. 그녀는 이 일의 적임자임이 분명하다. 최고의 전문가인 데다가, 이라크에 파견된 피츠타운 대학교 발굴단에 속하긴 했어요 그것에 좌우될 사람이 아니고, 날카롭고 이지적인 눈썰미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더런 양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사실 그녀를 설득하는 것은 의사로서 내가 한 가장 어려운 일들 중 하나였다). 설득이 끝난 다음에도 그녀는 내게 자신의 원고르르 보여 주는 것을 이상할 정도로 꺼렸다. 원고를 읽은 후에야 나는 그게 부분적으로 내 딸 실러에 대해 몇 가지 비판이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즉각 그녀를 안심시켰다. 요즘은 자식들이 활자상으로 거리낌 없이 자기 부모들을 비판하는 만큼 그들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오면 부모들도 싫을 게 없다고 말이다. 레더런 양이 내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글솜씨에 대한 지나친 겸손에서였다. 그녀는 내가 '문법 등등을 교정'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러기는커녕 단어 하나 바꾸지 않았다. (중략)
이 책에 대해 내가 한 일이 있다면 첫 장을 쓰는 재량을 발휘한 것뿐이다. 레더런 양의 친구 하나가 친절하게 제공해 준 편지의 도움을 받았다. 일종의 권두화를 그려내 해설자의 모습을 거칠게나마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에르퀼 푸아로를 처음 본 순간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같다. 물론 나중에는 그에게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누구든 마찬가지 감정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그를 만나기 전 내가 어떤 상상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날카롭고 예리한 얼굴에 키가 크고 여윈 셜록 홈즈 같은 인물을 떠올렸던 것 같다. 물론 나는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는 내가 기대한 것과는 완전히 딴판인 외국인이었다.
누구든지 그를 보면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는 무대나 그림에서 걸어 나온 사람 같았다. 우서 키는 165센티미터쯤 되고, 인상이 기묘하고 몸집이 통통했으며 몹시 눈에 띄는 콧수염에 달걀 같은 두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희극에 나오는 이발사 같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라이드너 부인을 살해한 자를 찾아내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달갑지 않은 느낌이 내 얼굴에 드러나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눈을 기묘하게 반짝거리면서 거의 직선적으로 내게 이렇게 말햇던 것이다.
"내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마 쇠르(자매님)? 잊지 마십시오. 푸딩의 가치는 맛을 보고 난 다음에야 결정된다는 것을요."
"선생 말은 아내의 전 남편이 발굴단원 중의 하나인데, 아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겁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몇 가지 사실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인은 약 15년 전 이 남자와 겨우 몇 달을 함께 살았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흐른 후 그와 마주쳤을 때 부인이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얼굴은 변했고, 체격도 달라졌을 겁니다. 목소리는 그렇게 바뀌지 않았겠지만 그건 쉽사리 변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부인은 그자를 주변 사람 중에서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요. 부인은 그를 외부 어딘가에 있는 사람, 낯선 사람으로 상정합니다. 그래요. 부인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또 형에게 그렇게 헌신적이었던 그 아이도 이제 어른이 되었습니다. 서른 살에 가까운 성인 남자를 보고 부인이 열 살이나 열두 살이었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윌리엄 보스너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가 보기에 자기 형은 반역자가 아니라 애국자, 그의 조국 독일을 위해 죽은 순교자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에게 라이드너 부인은 배신자입니다. 사랑하는 자기 형을 죽게 만든 괴물이라고요! 쉽게 영향을 받는 어린아이는 영웅 숭배에 빠져들 수 있고, 어린 마음은 한 가지 생각에 쉽게 사로잡힐 수 있답니다. 그 생각이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되는 거지요."
푸아로는 작은 수첩에 무엇인가 적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질서와 체계를 갖고 해 나갑시다. 첫 번째, 두 사람이 있습니다. 라비니 수사와 머케이도 씨입니다. 두 번째로는 콜먼, 에모트, 라이터가 있습니다.
이제 문제의 반대 국면으로 넘어갑시다. 수단과 기회 말입니다. 그 발굴단원들 가운데 범죄를 저지를 수단과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 누구일까요? 캐리는 작업장에 있었고, 콜먼은 하사니에에 있었고, 박사님 자신은 옥상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라비니 수사, 머케이도 씨, 머케이도 부인, 데이비드 에모트, 칼 라이터, 존슨 양, 그리고 레더런 간호사가 남습니다."
"오!"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의자에 앉은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죽은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는 관례가 있지요. 하지만 그런 관례는 부질없는 것 같아요. 어리석은 일이죠. 진실은 항상 진실이니까요.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입조심을 하는 게 오히려 낫죠. 그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까요. 반면 죽은 사람들에게는 그럴 염려가 없어요.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때때로 죽은 다음까지 지속된답니다.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실제로 그렇다고요! 텔야리미아를 짓누르던 그 기묘한 분위기에 대해 간호사에게 들으셨나요? 모두들 얼마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는지 들으셨냐고요? 또 그들 모두는 원수처럼 서로를 노려보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어요. 그것이 루이스 라이드너가 한 짓이에요. 3년 전 제가 어린 나이로 여기 왔을 때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유쾌한 팀이었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들은 꽤 잘 지냈어요. 하지만 올해 어두운 그림자가 그들을 덮쳤지요....... 그 여자가 한 짓이에요. 루이스 라이드너는 다른 누군가가 행복한 것을 못 견디는 그런 여자였어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그런 여자였던 거죠! 그 여잔 만사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어 했어요. 그저 재미로, 아니면 그럴 만한 힘이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요....... 아니 어쩌면 그저 그렇게 생겨먹었기 떄문인지도 모르죠. 한마디로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손아귀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여자였답니다!"
"그 여자는 육감적인 미인은 아니었어요. 그녀가 원한 건 불륜이 아니었어요. 그건 그 여자의 냉혹한 실험일 뿐으로, 루이스 라이드너는 사람들을 자극해 서로 대적하게 하면서 재미를 느낀 것뿐이랍니다.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다고요. 그 여자는 평생 누구와도 싸움을 벌인 적이 없는 그런 여자예요. 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싸움이 벌어지죠! 그녀가 싸움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 여자는 여자 이아고(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나오는, 계락과 음모에 능한 인물-옮긴이) 같아요. 드라마를 필요로 하죠. 하지만 자신이 연루되고 싶어 하진 않아요. 언제나 외부에서 줄을 조종하죠. 사태를 바라보면서, 즐기면서 말이에요."
"실제로 어떤 남자에게든 그의 아내의 실상을 밝히는 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반면 기묘하게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기 남편의 실체에 대해 의연합니다. 여자들은 자기 남편에 대한 애정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은 채 그가 건달, 사기꾼, 마약 중독자, 상습적 거짓말쟁이, 색골이라는 사실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답니다! 여자들은 놀라운 현실주의자들이지요."
"라일리 박사님, 라이드너 부인에 대한 당신의 정확하고도 솔직한 견해는 어떤 겁니까?"
라일리 박사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천천히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솔직한 견해란....... 이거 참 말하기 어렵군요! 난 그녀를 그렇게 잘 알지 못합니다. 그녀에겐 매력이 있었죠. 머리가 좋고, 친절했습니다....... 또 뭐가 있죠? 그녀에게는 흔한 결점 같은 것이 없었어요. 그녀는 천박하거나 게으르지 않았고, 심지어는 허영에 차 있지도 않았어요. 나는 그녀가 완벽한 거짓말쟁이라고 늘 생각해 왔답니다(증거는 없지만요). 내가 알 수 없는 것은(그래서 알고 싶은 것은),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만 거짓말을 했는가 하는 겁니다.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 좀 호의적입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여자는 상상력도, 동정심도 없는 여자니까요. 그녀가 정말 남자를 홀리는 여자였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거 '자신의 활과 화살'로 남자를 쏘아 떨어뜨리는 게임을 즐겼을 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내 딸의 생각을 알고 싶으시다면......."
"기쁘게도 이미 들었답니다."
푸아로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라일리 박사가 말했다.
"흠, 내 딸은 시간 낭비 같은 건 하지 않았겠군요! 그애는 상당히 난폭하게 말의 칼을 휘둘러댔을 겁니다! 젊은 세대는 죽은 이를 배려하는 마음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지요. 유감스럽게도 젊은이들 쪾이 예절에 대해 오히려 더 까다로운 것 같아요! 그들은 '구식 도덕'을 비난하면서 스스로는 훨씬 더 융통성 없는 빡빡한 도덕률을 세우지요. 만약 라이드너 부인이 몇 차례 연애 사건을 벌였다면 실러는 아마도 그녀가 '인생을 한껏 누렸다'거나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다'고 평가했을 겁니다. 라이드너 부인이 어떤 전형, 그러니까 자신의 전형을 충실히 따랐다는 사실을 실러는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쥐를 가지고 놀 때 고양이는 본능에 따라 행동합니다! 고양이는 그렇게 생겨먹은 겁니다. 남자들이란 보호받고 지켜져야 하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그들은 고양이 같은 여자, 충직한 스패니얼 같은 여자, 죽을 때까지 숭배할 만한 여자, 새처럼 쨱짹거리는 여자 등등 온갖 여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은 전쟁터입니다. 소풍을 나온 게 아니라고요! 난 실러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라이드너 부인을 증오했다고 솔직하고 겸손하게 인정했으며 합니다. 실러는 이곳에서 유일한 젊은 처녀로, 당연히 자신이 젊은 청년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런데 자신이 보기에는 이미 중년에 접어든, 그리고 이미 두 차례나 결혼한 여자가 나타나 여자의 영역에서 자신보다 앞서고 있으니 짜증나는 게 당연하지요.
실러는 잘 자란 처녀로 건강함과 상당한 미모를 갖춘 만큼 당연히 남자들에게 매력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라이드너 부인은 그 점에서는 평범한 미인 이상이었습니다. 그녀에겐 화를 불러오는 파멸적인 마력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키츠가 말한 '잔인한 미녀'같은 존재였지요."
나는 의자에서 튕겨지듯 일어섰다. 박사까지 이런 말을 하다니 우연의 일치치고는 좀 지나치지 않은가!
"박사님 따님이 혹시...... 좀 경솔한 추측인지 모르지만...... 그곳 청년들 중 하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게 아닐까요?"
"오, 그런 것 같진 않아요. 실제로 실러는 에모트와 콜먼을 춤 상대로 삼아왔습니다. 그 애가 둘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또 젊은 공군들도 두엇 있답니다. 지금으로선 그들 모두가 그 애의 그물로 몰려드는 고기에 불과한 것 같군요. 그래요, 어이없게도 젊은 자신이 나이든 여자에게 졌다는 생각 때문에 그 애는 그렇게 약이 오른 걸 테죠! 그 애는 나만큼 세상을 모르니까요. 내 나이가 되면 여학생의 얼굴과 맑은 눈빛, 단단하게 균형 잡힌 젊은 몸매의 진가를 알지요. 하지만 서른이 넘은 여자는 남자의 말을 열중해서 들어줄 줄 안답니다. 그리고 간간이 추임새를 넣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가 얼마나 멋진 남자인지를 환기시키죠.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청년은 거의 없답니다! 실러는 예븐 처녀에요. 하지만 루이스 라이드너는 정말 미인이었습니다. 빛나는 눈과 그 눈부신 금발이라니. 그래요, 그녀는 아름다운 여자였어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박사 말이 옳아. 미인이란 놀라운 존재야. 그녀는 아름다웠어. 시샘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뒤로 물러나 앉아 감탄하게 되는 아름다움이었지. 그녀를 처음 만난 날, 나는 라이드너 부인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가!
무슈 푸아로는 다분히 프랑스인다운 태도로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 말씀에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군요, 마드무아젤. 그저 소문을 전해 듣고 싶었답니다. 전 젊은이들의 연애 사건에 늘 관심을 갖고 있거든요."
"그랬군요. 진실한 사랑이 평탄하게 진행되는 것은 좋은 일이죠."
존슨 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푸아로도 응답이라도 하듯 한숨을 내쉬엇다. 존슨 양은 처녀 시절 자신의 연애 사건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나는 푸아로에게 아내가 있는지, 그리고 외국인들에 대해 들은 대로 그에게도 정부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의 외모가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워 보였으므로, 그런 일은 좀처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 즈음 나는 무슈 푸아로와 내가 어떤 환자를 맡고 있는 담당 의사와 간호사 같다는 느낌을 같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그 일은 하나의 수술처럼 보였고, 그는 집도 의사 같았다. 이렇게 말해서 안 될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일을 즐기기 시작했다.
간호사 훈련을 마친 직후 있었던 일이 머릿소게 떠올랐다. 당시 나는 어떤 가정집으로 환자를 돌보러 갔다. 즉각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 생겼는데, 환자의 남편이 요양소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요양소로 옮겨야 한다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집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버텼다.
음, 나에게는 물론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나 이외에 다른 간호사가 없었다. 내가 모든 걸 맡아서 해야 했다. 물론 내 신경은 극도로 곤두섰다. 의사가 무엇을 필요로 할지 생각해 빠짐없이 준비해 두었지만, 그럼에도 뭔가 잊은 것이 없는지 걱정스러웟다. 의사들이란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때때로 정말 이상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 일은 아주 잘 진행되었다! 의사가 뭔가를 요구할 때, 나는 이미 그것을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수술이 끝난 후 그 의사는 내게 정말 잘했다고 말했다. 의사들은 대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 개업의 역시 아주 훌륭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일을 혼자 해냈던 것이다!
환자 역시 회복되었으므로, 모두들 행복한 셈이었다.
음, 나는 그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어던 점에서 무슈 푸아로는 그 의사를 생각나게 했다. 과거 그 의사 역시 키가 작았다. 원숭이 같은 얼굴을 한 못생기고 키 작은 사내였지만 외과의로서는 탁월했다. 그는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엇다. 많은 외과 의사를 만나본 나는 의사들 간에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중략)
난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나로서는 무슈 푸아로가 내게 바라는 일과 바라지 않는 일이 어떤 것들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가 일부러 내게 그 손수건을 찾아오게 했는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내가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하는 뜻에서.
이 일은 또다시 수술 과정과 흡사해졌다. 주의를 기울여 의사가 원하는 것만을 건제주고 원하지 않는 것은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필요로 하지도 않을 때 동맥용 핀셋을 건네준다면, 정작 그것이 필요한 때에는 지체하게 되지 않겠는가? 다행히 나는 내 일을 잘 알고 있다. 간호 일에서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일에서는 정말이지 경험 없는 초보가 아닌가. 그러므로 난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중략)
생각해 보니 나는 특권을 갖고 있었다.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날 때 간호사는 많은 것을 듣게 된다. 환자는 간호사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간호사가 그런 이야기를 들엇다는 것을 대개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로 간호사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마련이다. 나는 캐리 씨를 환자로 간주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는 사실을 모르는 체 있는 편이 좋다. 내 행동이 단순히 호기심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면, 실제로 호기심이 통했노라고 인정하련다. 나는 이 사건에서 가능한 한 아무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한 끝에 나는 슬쩍 몸을 피해 커다란 흙더미 뒤를 빙 돌아가 그들이 있는 곳에서 30센티미터를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 서 있으면 흙더미 모서리에 가려져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이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리라. 환자를 맡고 있는 간호사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눈의 여왕과 소년 카이에 관한 북구 동화였지요. 제 생각에 라이드너 부인은 그 여왕과 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소년 카이를 줄곧 속여 넘기던 여왕 말입니다."
"아, 그래요. 한스 안데르센의 동화 아닌가요? 그리고 그 이야기엔 소녀 하나가 나오지요. 게르다라는 이름이었던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줄거리는 대부분 잊어버렸습니다."
"좀 더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에모트 씨?"
데이비드 에모트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녀를 제대로 파악했는지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지요. 어느 날엔 악마 같은 짓을 하는가 하면 그 다음 날에는 정말이지 천사처럼 변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사건의 핵심이라는 선생님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늘 원하던 것이 바로 그거였으니까요. 사태의 중심이 되는 것 말입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좌지우지하고 싶어 했어요. 제 말은 그러니까 토스트와 땅콩버터를 건네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녀는 상대가 자신을 위해 내심을 토로해 주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그런 그녀를 만족시켜 주지 않았다면요?"
"라이드너 부인의 취향은 단순하다 못해 금욕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분명 사치스러운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한편 그녀가 한땀한땀 놓고 있던 자수는 너무나도 섬세하고 아름다웟지요. 그 사실은 그녀가 까다롭고 예술적인 취향을 지닌 여자였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녀의 방에 있던 책들을 살펴보고 나는 그런 심증을 더 굳힐 수 있었습니다. 그려는 똑똑한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기주의자였다고 짐작됩니다.
라이드너 부인이 남성을 사로잡는 것을 주된 관심사로 삼는 여자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 실제로 그녀가 감각적인 여자였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점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방 선방 위에는 『그리스인들이란?』『상대성 이론 입문』『레이디 헤스터 스탠호프의 일생』『므두셀라로 돌아가라』『린다 론든』『크루 트레인』같은 책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우선 문화와 현대 과학, 그러니까 극히 이지적인 분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소설들 가운데에서『린다 론든』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크루 트레인』같은 작품을 보면 라이트너 부인이 독립적인 여성, 다시 말해서 남자에게 구속되거나 영향받지 않는 여성들에게 공감과 관심을 갖고 있엇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또한 레이디 헤스터 스탠호프의 성격에도 흥미가 끌린 것 같습니다.『린단 론든』은 한 여자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경배하는 내용을 담은 보기 드문 책입니다.『크루 트레인』은 한 열정적인 개인주의자에 대한 스케치이고『므두셀라로 돌아가라』는 정서적이기보다는 지적인 삶의 태도에 공감하고 있는 책입니다. 나는 죽은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젊었고 뛰어난 미인이었습니다. 단순히 획일적인 미인이 아니라 지금처럼 남자의 정신과 감각을 사로잡는 예의 그 마력적인 미모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미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자였지요.
그런 여자들은 당연히 결혼이라는 개념에 반감을 품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남자들에게 매혹당할 수는 있지만, 그보다 독립적인 존재로 남아 있는 편을 더 좋아하죠. 그들은 정말이지 전설 속의 '무자비한 미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라이드너 부인은 결혼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남편이 강한 성격의 남자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스파이 행위가 밝혀지자, 라이드너 부인은 레더런 간호사에게 털어놓은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미국 정부에 그 사실을 알린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행동에는 심리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레더런 간호사에게 말하기를, 당시 자신은 순진한 애국심에 불타는 풋내기여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했스빈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동 동기에 대해서 스스로를 기만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가장 그럴싸하게 들리는 동기를 선택한답니다! 라이드너 부인은 자신이 애국심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믿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남편을 제거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구의 표출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자신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는 느낌이 싫었던 겁니다. 실제로 그녀는 누군가의 밑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국심이라는 방식을 빌어 자신의 자유를 되찾은 겁니다."
무슈 푸아로는 시리아로 돌아갔다가, 딱 일주일 후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 또 다른 살인 사건을 맡았다. 그가 명석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날 놀린 일은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내가 그 범죄에 가담했거나 진짜 간호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의사들은 때떄로 그런 식이다. 몇몇 의사들은 상대의 감정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농담을 한다!
나는 라이드너 부인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 어떤 여자였을까......? 때로는 그녀가 무시무시한 여자였던 것 같고, 때로는 그녀가 내게 얼마나 친절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부드러웟는지.......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 같은 것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결국 그녀는 비난보다는 동정을 받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라이드너 박사에게도 연민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두 차례나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 해도 그런 감정이 달라지진 않는 것 같다. 그는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했다.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건 좀 무시무시한 일이다.
어쨌든 나이가 들수록,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슬픔과 병 같은 것을 겪으면 겪을수록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이 측은해진다. 때로는 숙모님이 나를 키울 때 정해 두신 그 훌륭하고 엄격한 규칙들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신앙심이 깊고 몹시 까다로우셨던 숙모님. 그녀는 이웃의 모든 결점들을 안팎으로 꿰고 계시지 않앗던가.......
오, 이런, 라일리 박사의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어떻게 책을 끝맺는 게 좋을까? 멋지게 어울리는 한 구절을 찾아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라일리 박사에게 알바어 구절이라도 하나 여쭤 봐야겠다.
무슈 푸아로가 사용했던 것 같은 구절을.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그 비슷한 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