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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청산가리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평점 :
레이스 대령은 생각에 잠긴 채 담배 파이프를 뻑뻑 빨며 조기 바턴을 응시했다.
레이스는 조지 바턴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바턴의 숙부가 레이스 가의 옛 이웃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나이 차가 스무 살 이상이나 났다. 예순이 넘은 레이스 대령은 키가 크고 항상 등을 꼿꼿이 펴고 다니는 군인 타입으로, 얼굴은 햇볕에 짙게 그을었고 철회색 머리는 짧게 깎은 스타일이었으며 눈은 날카롭게 빛이 났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특별히 가깝게 지낸 적은 없었지만, 바턴은 지금까지도 레이스에게 '어린 조지'로 남아 있었다. 먼 과거로부터 근근이 이어져 온 희미한 인연 중 하나였다.
레이스 대령은 지금, 이 '어린 조지'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음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조지가 성인이 된 후 몇 년간 두 사람은 간간이 만났지만, 서로에게서 공통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었다. 레이스는 바깥 활동을 주로 하는 사람, 말하자면 세력 확보에 주력하는 '건국자' 타입이며 인생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조지는 단연 전형적인 '도시 신사'였다. 둘은 겹치는 관심 분야도 없었으며, 만나면 겨우 '옛날이 좋았지!' 식의 미적지근한 회상만 하다가 할 말이 없어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레이스 대령은 일 업이 수다를 떠는 타입이 아니었고, 한마디로 구세대 소설가들이 좋아했을 법한 강하고 말 없는 사나이였다.
지금도 레이스는 말없이, '어린 조지'가 왜 그렇게 꼭 만나자고 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레이스 대령이 보기에 조지는 일 년 전 봤을 떄에 비해 어딘지 미묘하기 달라져 있엇다. 조지 바턴은 언제나 답답한 사람의 전형이었다. 매사에 신중하고, 실질적이고,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
그런제 저 친구 오늘은 뭔가 이상해 보여. 대령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토끼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단 말이야. 벌써 시가에 세 번째로 불을 다시 붙이고 있었는데, 그건 전혀 조지 바턴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1945년에 나온 작품이자 레이스 대령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레이스 대령은 이 소설의 중간쯤 가서야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사건을 진두지휘하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에 매달리지는 않는다. 다소 방관자적인 위치를 취하다가 사건의 물꼬를 트는, 그 역할을 여기서도 유지한다.
로즈메리라는 여성이 사망한다. 사인은 청산가리 복용. 룩셈부르크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에서 생일파티를 하던 중이었다. 그날 디너파티에 참가했던 사람은 로즈메리의 남편 조지와 동생 아이리스, 조지의 비서 루스와 패러데이 부부, 그리고 앤터니라는 청년이다. 원래는 레이스 대령까지 초대되어 남녀의 수가 정확히 맞았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가는 일정이 잡히면서 불참하였다. 우울증 때문에 직접 샴페인에 청산가리를 넣어 마셨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사건 6개월 후 익명의 편지로 인해 남편은 아내가 타인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그 테이블에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의자는 좁혀지며, 와인을 담당한 수석 웨이터는 레이스 대령도 인정한 믿을 만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함께 만찬을 즐겼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볼 때, 동기가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로즈메리는 스티븐 패러데이와 불륜관계였으며 그 사실을 그의 아내도 알고 있었고, 아이리스는 언니의 죽음으로 엄청난 유산을 받게 되며, 루스는 조지를 짝사랑하고 있었고, 앤터니는 감옥에 있던 과거를 로즈메리에게 들키고 만다.
"경찰에는 의뢰하지 않을 겁니다. 대령님을 뵙자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예요. 살인범을 잡을 함정을 놓고 싶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들어 보세요, 대령님. 룩셈부르크에서 파티를 열 계획입니다. 대령님도 와 주세요. 똑같은 멤버예요. 패러데이 부부와 앤터니 브라운, 루스, 아이리스, 그리고 저까지요. 이미 계획은 다 세워 놨습니다."
"어쩔 셈인가?"
조지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비밀입니다. 미리 말해 버리면 재미없죠....... 대령님께도 아직은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오셔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관찰해 주세요."
레이스는 상체를 앞으로 바싹 기울이고 아까와는 다른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이런 짓은 마음에 안 들어, 조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그런 극적인 아이디어는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아. 경찰에 가게....... 다들 뛰어난 수사관들이야.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가장 잘 알고 있어. 전문가들이지. 아마추어가 수사관 흉내 내는 건 말리고 싶네."
"그래서 대령님을 초대한 겁니다. 아마추어가 아니시잖아요."
"이 친구야. 단지 내가 M15에서 잠시 일했다고 해서? 그러면서 온전히 다 털어놓지도 않는군."
"그럴 필요가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 거절하겠어. 자네의 계획이란 게 마음에 안 들어. 동참하고 싶지 않아. 그만둬, 조지. 믿고 맡겨도 될 사람이 있다니까."
결국 그 날의 그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파티가 벌어지고, 레이스 대령은 불참한다. 장소, 시간, 좌석 배치까지 같지만 결국 무사히 마무리 되는 것 같다가, 샴페인을 마신 사람이 또 쓰러진다. 이번에 숨을 거둔 사람은 조지였다.
레이스 대령은 런던 경찰청으로 들어갔다. 대령은 경관이 가져온 용지를 작성해서 내고 몇 분 후에는 켐프 경감의 사무실에서 경감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켐프는 런던 경찰청의 터줏대감인 배틀 총경과 여러 면에서 스타일이 비슷했다. 실제로 배틀 총경의 지휘 하에 몇 년간 일했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선배의 매너리즘을 답습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나무를 깎아 놓은 것 같은 생김새마저 비슷했다. 그러나 배틀이 티크나무나 오크나무를 깎은 것 같다면, 켐프 경감은 좀 더 보기에 그럴싸한 나무, 예를 들면 마호가니나 아니면 오래된 자단 재목을 조각해 놓은 것 같았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령님."
켐프가 말했다.
"이번 사건은 외부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푸아로였다면 기꺼이 이 계획에 동참했을 것이고,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조지가 샴페인을 입에 대는 순간 저지시켜 살려냈을 것이며, 범인이 누군지도 밝혀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스 대령은 처음부터 이 계획을 반대했고, 결국 초대에 응하지 않았으며, 대신 룩셈부르크로 가서 멀리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서 이들을 감시하다 결국 두 번째 살인을 목격하게 되며 누가 범인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 책의 1부는 사람의 이름으로 장이 나뉘어진다. 각각 아이리스 말리, 루스 레싱, 앤터니 브라운, 스티븐 패러데이, 조지 바턴으로 나누어지며, 각자의 인물의 시점에서 사건에 대해 회상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건이 시점을 계속 바꾸어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의미가 달라지는 데에서 오는 재미가 있다. 이런 형식은 우리 나라 소설 중 <엄마를 부탁해>를 연상시키기도 하며, 몇 년 전에 읽은 <마이 시스터즈 키퍼>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 소설이 특징적인 것은 여기까지. 인물 하나 하나에 대한 묘사도 좋았지만 사건이 풀려나가는 부분은 의외로 쉬운 데다가, 레이스 대령은 마지막까지 틀렸고,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세세한 부분에 대한 궁금증은 남는다. 즉, 첫번째 살인의 이유가 질투인지, 사랑인지 명확하지 않은 데다가, 만약 돈 때문이라면 연달아 두 명을 죽일 계획이 너무 광대하고, 그 광대함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부족하다. 한 남자에 대한 연정을 품었다가 쉽게 다른 이에게 옮겨 가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없어서 빈약하다는 느낌을 준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이라면 용의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범인으로 확정된 사람을 통해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그 과정이 없어서 범죄자의 심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