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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 불명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평점 :
"남편 분은 처음 이틀은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날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날 동료 한 명에게 회의에 참석하는 대신 바토 무슈를 타고 여행을 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바토 무슈요? 그게 뭐죠?"
제솝은 미소를 지었다.
"센 강을 따라 운행하는 작은 배입니다."
(중략)
"베터튼 씨는 그날 밤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는 어떤 국경도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의 여권을 갖고 통과하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남편 분이 또 다른 여권을, 그러니까 다른 이름으로 된 여권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중략)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톰은 기밀을 팔아넘기거나 누설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이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요. 그 사람은 평생 깨끗하게 살아왔어요."
(중략)
"그렇습니다. 베터튼 씨는 뛰어난 과학자였습니다. 그게 바로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는 어떤 제안을, 말하자면 이 나라를 떠나 다른 어딘가로 가라는 중요한 제안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1장을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셜록 홈즈의 한 에피소드였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국가 기밀을 다루고 있는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사라진 사건으로, 정황상 외국에 매수되었다고 보여지나, 약혼녀는 그가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이라며 그럴리가 없다고 하는 내용.
1954년에 나온 이 책에는 어떤 탐정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초반에 분위기가 다른 크리스티의 소설들과 사뭇 다르며, 계속해서 등장하는 낯선 인물들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저는 그가 어떤 중요한 임무를 띠고 외국으로 보내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소 기이한 말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비밀리에 추진하는 그런 일 있잖습니까, 왜."
"이것 보세요, 선생님......."
제솝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베터튼은 과학자 압니다. 외교관이나 첩보원이 아니에요."
"제 말이 못마땅하신 거군요.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신분이 항상 정확한 건 아니니까요. 제가 왜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토머스 베터튼과 저는 인척 관계입니다."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과학자, 6개월의 결혼 생활만큼이나 남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두번째 결혼의 아내, 사별한 첫번째 아내의 사촌의 등장, 실종 전 만난 의문의 여성.
"그렇지 않아요. 흥미로울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저는 별 볼 일 없는 여자예요. 사랑했던 남편은 저를 버리고 떠났고, 하나뿐인 아이는 수막염으로 고통스럽게 죽었어요. 가까운 친구나 친척도 없어요. 직업도 없고, 좋아하는 취미나 예술 따위도 없어요."
베터튼 부인과 외국에서 온 의문의 남성을 연이어 조사한 제솝은 베터튼 부인이 영국을 떠나 카사블랑카로 향한 것에 의심을 품는다. 마침 부인이 탔던 비행기는 추락했고, 원래 그 비행기에 타기로 했던 힐러리는 비행기 연착으로 그 비행기를 타지 못해 목숨을 건진다. 그 비행기를 타서 죽지 못한 것을 아쉬워해 수면제를 삼키려하던 힐러리를 제솝이 제지하며,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자신들의 일을 도와달라며 병원에서 위독한 상태에 있는 베터튼 부인의 역할을 대신 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인간의 본성은 어디를 가나 똑같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입니다. 과거든 현재든 언제나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바로 잔혹함과 자비죠! 둘 중 하나일 때도 있고, 때로는 둘이 공존하기도 합니다."
그는 태도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카사블랑카에서 끔찍한 비행기 사고를 당하셨다면서요?"
"예, 그랬어요."
"부럽습니다."
아리스티데스 씨는 뜻밖의 말을 했다.
힐러리는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듯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특별한 경험을 했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죽음에 가가이 다가가는 경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살아남으셨다니....... 그 이후로 뭔가 자신이 달라졌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부인?"
"더 불행해진걸요. 뇌진탕을 입어서 심한 두통이 생긴데다 기억도 흐릿해졌어요."
"그런 것들은 그저 단순한 불편함일 뿐이지요."
계속되는 여행 속에서 연이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만나던 힐러리는, 자신을 베터튼 부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끌려서 비행기를 타게 된다.
"신문 헤드라인을 떠들썩하게 장식하겠군요."
베이커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부인 말이에요. 불운이 줄줄 따라다녔다고 하겠어요. 처음엔 카사블랑카에서 사고로 거의 죽을 뻔했다가 이제 더 비참하게 죽었으니 말이에요."
힐러리는 그들이 세운 계획의 교묘함과 용의주도함에 몸을 떨었다.
"이 사람들은요......?"
힐러리가 낮게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가 맞나요?"
"아, 배런 박사는 세균학자인 걸로 알고 있어요. 에릭슨은 유명한 물리학자고 피터스는 화학 연구원이죠. 물론 니드하임 양도 수녀가 아니에요. 그녀는 내분비학자죠. 그리고 나는 연락 장교일 뿐 과학자들 그룹에 속하진 않아요."
그녀는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헤더링턴 양은 운이 없었어요."
"헤더링턴 양은...... 그 여자는......"
베이커 부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다면 말해 줄게요. 그 여자는 당신을 미행하고 있었어요. 카사블랑카에서 당신 뒤를 쫓는 사람쯤은 벌써 파악했어요."
제솝은 힐러리에게 힐러리도 모르게 사람을 붙였으나, 이 주도면밀한 조직들은 그마저 따돌리고 힐러리를 비행기에 태운다. 비행기는 불시착하고, 마치 추락한 것으로 꾸며지며, 그들은 차로 갈아타며 사막 한가운데의 요새로 향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지만 속마음은 제각기 다른 것 같아요."
피터스는 생각에 잠겨 신중하게 말했다.
"글쎄요. 부인께서 뭔가 제대로 짚으신 것 같군요.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부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배런 박사는 결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자기의 실험과 연구를 위해 돈이 필요할 뿐이죠. 헬가 니드하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파시스트처럼 보여요. 그리고 에릭슨은......."
"에릭슨은요?"
"나는 그가 두려워요. 그는 위험한 외골수예요. 마치 영화에 나오는 미치광이 과학자 같아요!"
"그리고 나는 인류 동포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고 당신은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이지요. 그리고 캘빈 베이커 부인은....... 당신은 그녀를 어떻게 보는지요?"
"모르겠어요. 가장 알 수 없는 사람 같아요."
"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야말로 가장 뻔한 사람 아닙니까?"
"무슨 말씀이죠?"
"캘빈 베이커 부인이 줄곧 따라다닌 것은 돈입니다. 그녀는 짭짤한 보수를 받고 일하는 큰 톱니바퀴의 한 부품일 뿐입니다."
동상이몽. 각자 다른 생각을 한 이들은 요새에 도착한다. 엄청난 자산가에 의해 설립된 사막 한 가운데의 그곳은 이른바 유토피아.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며 의식주에 모자람이 없으며,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모여 연구에 몰두한다. 과연 이곳을 천국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의 조직에서, 힐러리가 빠져나오는 과정은 다소 용두사미 같다는 느낌도 든다.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미약하다는 느낌. 물론 1927년의 <빅 포> 처럼, 푸아로의 원맨쇼와 함께 끝은 조직의 일망타진으로 이어지는, 그 소설과는 시작만 비슷하고 결말은 다르다. 이 책에서 이 미치광이 거부는 결국 사소한 소동만 있을 뿐,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을 그대로 계속하며, 힐러리와 함께 정체를 감추고 있던 한 남자만이 그곳을 빠져나온다. 아마도 다른 과학자들을 자발적으로 남았으리라. 이걸 추리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결말에 가서 생각지도 못했던 살인 사건에 대한 해결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 결말은 붙이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없는 내용이다. 갑자기 크리스티가 이런 소설을 쓴 이유는 왜일까, 생각해보았는데, 아마도 이 부분이 크리스티가 소설을 쓴 이유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 같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새 동지들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는 새로 온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몇 마디씩 짧은 인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이 단지의 목적과 신념에 대한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을 듣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힐러리는 그 내용이나 표현을 정확하게 다시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내용이 너무 진부하고 평범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듣고 잇는 동안에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힐러리는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독일에 살았던 친구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그 친구는 '그 미치광이 히틀러'의 연설을 한 번 들어 보고 싶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집회에 참석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격정에 사로잡혀 열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고 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렇게도 지당하고 감동적으로 들렸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야말로 평범하기 짝에 없는 말들에 불과하더라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 지금 힐러리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힐러리는 감동과 흥분으로 마음이 일렁였다. 국장은 아주 간결하게 말했다. 주로 젊은이들에 관한 말이었다. 그는 인류의 미래는 청년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