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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평점 :
많이 팔리는 책이 많이 팔린다. 그게 현실이다. 우리 나라에 그런 현상이 조금 더 심하다는 걸 고려해도 그렇다. 많이 팔리는 책이 더 많이 팔리고, 베스트셀러가 된 후에 더 많이 팔린다.
하루키의 문학세계에 대해서라면 덧붙일 말이 없다. 『상실의 시대』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읽은 전부다. 『1Q84』와 『해변의 카프카』를 도전했다 실패했다. 에세이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확신하게 되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건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라, 그냥 하루키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전 세계적인 판매량에 대한 무심한 태도, 외국에서의 소박한 삶, 일본 문단과의 의도적 거리 설정, 달리기, 수영, 새벽 기상 그리고 30년 넘는 작품 활동. 그런 것들 말이다.
일인칭 소설을 쓸 때, 많은 경우 나는 주인공인 (혹은 화자인) ‘나’를 대략 ‘넓은 의미에서 가능성으로서의 나 자신’으로 인식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실제의 나’는 아니지만 장소나 시간이 바뀐다면 어쩌면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나 자신의 모습니다. 그런 형태로 가지를 쳐나가면서 나는 나 자신을 분할하고 있었다는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46쪽)
소설 바깥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넓은 의미에서 가능성으로서의 하루키 자신’으로 분할된 주인공들을 본다. 그들은 ‘장소나 시간이 바뀐다면 어쩌면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를 하루키의 모습’이다. 예를 들면.
큰 냄비에 물을 끓이고, 토마토를 중탕해 껍질을 벗기고, 칼로 잘라 씨를 뺀 다음 과육을 으깼다. 커다란 스텐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을 볶다가 으깬 토마토를 넣고 충분히 끓였다. 수시로 거품을 걷어냈다. (275쪽)
두 사람은 식탁에 앉고, 나는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아스파라거스와 베이컨으로 만든 소스를 소스팬에 부어 데우고, 양상추와 토마토와 양파와 피망으로 샐러드를 만들었다. 물이 끓자 파스타를 삶고 그 사이 파슬리를 다졌다. 냉장고에서 아이스티를 꺼내 유리잔에 따랐다. (2권, 27쪽)
나는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이 없다. 하지만, 하루키가 혹은 하루키의 분신이 이렇게 요리하는 장면들을 읽고 있노라면,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이 막 생기려고 한다. 아스파라거스와 베이컨으로 만든 소스를 부은 파스타라니.
초상화 작가인 ‘나’와 모델이 된 ‘마리에’의 대화는 좀 뜬금없다. 문화센터 선생님과 단둘이 마주 앉아 이런 대담한 대화, 가슴과 성기에 대한 대화를 나눌 여고생이 실제로 있는지 모르겠다.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00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 읽기를 멈추고 앞에 앉은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뭐랄까. 아주 재미있다고는 못 하겠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읽게 되네. 좀 맹숭맹숭한 느낌인데 말이야, 멈출 수가 없어.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음식으로 표현하자면, 간장 양념장을 끼얹은 연두부 같은 느낌이랄까. 보기에 예쁘고 먹기에 편하고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도 좋지만, 와~~맛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이지는 않은.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