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은 성별(남성성/여성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성별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성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회 문제도 젠더나 계급, 나이 등 한 가지 모순으로
작동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낯선 시선>, 14쪽)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위키백과에는 “여성주의 또는 페미니즘”을 “여성 억압의 원인과 상태를 기술하고 여성 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운동 또는 그 이론”이라고 정의해 두었으나, 내게 더
쉽게 다가왔던 페미니즘 정의는 아래와 같다.
페미니즘은 사람들 간에 무수한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차이보다는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훨씬
크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차이에 주목하기 때문에 차이가 커 보이지만,
공통점에 주목하면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40쪽)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보다 인간이라는 공통점에 주목하는 생각들이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이다. 더 간단한 것도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페미니즘 정의다.
여자도 사람이다(이게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생각이라는 것, 나도 안다). 여자도
털이 난다. 여자도 땀이 난다. 여기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잘못된 것은 우리가 타고난 신체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도록 길들여졌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의 건강과 행복이 공격받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다운게
어딨어>, 212쪽)
누군가 내게 페미니즘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페미니즘이란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주장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니, 도대체 누가 여자를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가. 당연히 여자도 사람이다.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여자는 사람이지만 아직 사람이 아니다,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예컨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민주사회에서 자궁을 가진 개인은 독립적인 법적 지위를 가지지 못했으며 평의회 의원이나 판사가 되는 것을 금지당했다.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사업을 하거나 철학적 논의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 위대한 철학자, 웅변가, 예술가, 상인
중에 자궁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피엔스>,
214쪽)
지금 상황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다른가. 여성은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있는가. 내가 가진 여러 정체성 중에 ‘여성’은 여러 정체성 중 하나다. 나는 여성이고, 한국인이다. 딸이고 아내이고 엄마이고 며느리다. 시민이고 주민이고 교회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친구고 언니이고 동생이다. 나의 여러 정체성 중에 ‘여성’이라는
정체성만 강조한다면, ‘여성’이라는 정체성만을 강요한다면, 그건 개인으로서의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제는 페미니즘을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남녀 임금 격차(gender wage gap)를 발표한 2000년부터 부동의 1위를 지켜 왔다. 2014년도 역시 압도적 1위였다.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36.7퍼센트 덜 받는다(2위
에스토니아는 26.6퍼센트). 2015년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29개 조사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세계경제포럼의 성차별 지수 역시 145개국 중 115위다. (<낯선 시선>, 257쪽)
그러니까, 위의 통계로만
이해하면, 한국의 여성은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36.7 퍼센트의
임금을 덜 받는다. 키가 작다는 이유로, 얼굴이 잘생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부색의 이유로, 머리카락 색깔의 이유로
차별을 받는 건 옳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생식기의 차이 때문에, 자궁이 있다는 이유로, 여성은 똑같이 일하고 남성보다 적게 받는다. 지금도 그렇다.
물론, 페미니즘은 여성
문제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성별, 즉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그 구별(젠더)가 만들어낸 효과로서 젠더가 작동하는 현실을 문제 삼는다. (<낯선
시선>, 14쪽) 또한 지식의 형성 과정, 권력의 작동 지형과 역사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학문이자 실천 방식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의 도전>, 11쪽) 여성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해 모성과 여성 혐오,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고민은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성 정체성에 대한 사고로, 노동과 과학 그리고 환경으로 관심 범위가 확대된다.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의 목차 그대로다.
마지막으로,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가치는 ‘자기 성찰’이다.
그렇게 다양한 측면에서 본 사람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 자신이 본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자신의
무지를 알아 가는 과정. 바로 이러한 소통과 연대가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입니다.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24쪽)
내게는 이번 여행이 내 안의 부족함을
들여다보고 다시 성찰하는 시간이었다. 과거의 나를 부끄러워하고 지금의 나 역시 완벽하지 못한 인간임에
절망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깨닫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 이번 여행의 또 다른 수확이다. 그래, 내가 그동안 공부를 해왔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 만약 내가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나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에도 나는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더 읽고, 더 보고, 더 듣고, 더
이야기하고, 더 써야겠다고 새삼 결심했다. (<잘 지내나요?>, 157쪽)
자신이 본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 자신의 무지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 자신이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럼에도 또 다시 공부하겠다고, 알아가겠다고 결심하는 것, 나는 이것이 페미니즘을 통해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성과라 생각한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
내가 생각없이 무심코 뱉은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감각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라 생각한다. 페미니즘이라는 하나의 시선을 통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자신과 조건, 상황이 다른 인간을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다.
나는 여성으로서 차별과 차이 속에 살아왔지만, 이성애자이기에 성정체성과 관련해 불편을 겪은 적이 없다. 나는 전업주부로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있지만, 직장일과 가사 노동, 이중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어려움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다. 나는 40대로서
대학에서 학점에 목매며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도 (어디든, 어떤 직장이든) 정규직으로 취업했던 세대로, 취준생과 비정규직의 절망을 잘 알지
못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으로 ‘서울 중심’의 사고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내가 겪었던 불합리와 모순을
인식하게 되면서, 그리고 그 거짓말들이 다른 상황에서 다른 모양으로 변용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됐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왜 여성주의가, 페미니즘이
그 시작점이냐는 질문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은 여자이고, 예전부터 지금까지 여성은 한결같이 차별의 대상이다.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이다.
알려진 모든 인간 사회에서 최고로 중요한
위계질서가 하나 존재한다. 바로 성별이다.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 적어도 농업혁명 이후로는 그랬다. (<사피엔스>, 2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