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과학소설에 수여되는 모든 상을 석권한 엄청난 소설『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작가 테드 창은
미국 브라운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과학도이다. 동시대 과학소설 작가들의 인정과 동시대
과학소설 독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고 한다.
나는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는데, 만약 책과 영화 중에 무엇이 더 좋냐고 묻는다면 책과 영화가 각각 다른 재미와 의미가 있다,는 판에 박힌 말을 한 번 한 후에, 그래도 머리 속이 아니라 눈앞에
그려진 외계인의 모습을, 진짜 외계인을 보고 싶다면, 영화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다윈으로부터 시작해 인간이 하나의 계통으로부터 진화해 현인류에까지
이르렀다는 진화론이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부터 현재까지 오랫동안 거부되고 부정된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 믿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타의 다른 동물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여러 동물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인간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지구의 유일한 지배자인 인간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외계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은하
속의 태양계, 태양계 속의 지구, 지구에 존재하는 우리 인간들은
우리만큼 혹은 우리보다 지적으로 과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진화한 지적 생물체를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의 ‘특별함’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는 외계인의 외양을 이렇게 묘사한다. 외계인들에게
피랍되었다가 탈출하거나 일정한 실험 후에 돌려보내진 지구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과대망상’이라는 진단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단 그들의 증언은 이렇다.
피랍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피랍과 관계된 외계인은 크게 네 가지 모습으로 한정됩니다. 첫 번째는 인섹토이드insectoid로, 곤충 특히 사마귀의 모습에 가까우며, 둘째는 큰 그레이로, 키가 150-180센티미터 정도 되는 키에 회색빛 혹은 연두색 피부를
가졌다고 합니다. 눈은 검고 큰 아몬드형이고, 궁둥이는 독립적으로
발달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코, 입, 귀는 퇴화되어 흔적만 있고 머리가 몸체에 비해 월등히 발달되어 몸이 전체적으로 가분수형입니다. 셋째는 작은 그레이로, 키만
90-120센티미터 정도로 조금 작을 뿐, 모양새는 큰 그레이와 거의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형인데, 이 외계인은 인간과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외계 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 174쪽)
이 책에서는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외계인은 일곱 개의 가지가 맞닿은 지점에
올려놓은 통처럼 보였다. 방사상으로 대칭이었고, 가지는 모두
팔이나 다리로 기능할 수 있었다. 내 앞에 있는 그것은 네 다리를 써서 걷고 있었고, 나머지 세 개의 가지는 팔처럼 측면에 말려올라간 상태였다. 게리는
이들은 ‘헵타포드’ (heptapod, 그리스어에서 7을 뜻하는 hepta와 발을 뜻하는 pod를 합친 조어)라고 불렀다. (160쪽)
머리 속으로 외계인을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에는 틀림없지만, 영화에서 화면을 보면 딱 한 마디가 나온다. 나 역시 그랬다. 외계인과의 첫 만남을 앞둔 여주인공과 함께 긴장과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스크린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옆에 앉은 딸롱이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뭐야, 문어잖아?!” (가운데 큰 원은 헵타포드의 문자다. 헵타포드는 그 옆의 음영으로만 보인다.) 또 다른 설명이다.
나는 체경으로 바싹 다가가 헵타포드의 여러 신체 부위, 이를테면 칠지라든지 손가락, 눈 따위를 가리키고 그에 해당하는 단어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동체 아래쪽에 연접한 골질의 주름 사이에 구멍이 하나 나 있음이 밝혀졌다. 아마 이것은
음식 섭취를 위한 것이고, 동체 꼭대기에 있는 구멍은 호흡과 발화를 위한 것인 듯했다. 그 밖에 특별히 눈에 띄는 구멍은 없었다. 아마 입이 항문의 역할까지
맡고 있는 듯했는데 이런 종류의 의문을 해결하는 것은 일단 미루어두는 수밖에 없다. (170쪽)
외계인의 외모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일까. 화면 속 외계인 헵타포드는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혹은 받아들일
수 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 물론이다. 이 외계인은 테드
창이 상상해 낸 외계인이다. 그렇다면 진짜 외계인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우리의 상상 너머에 있는 외계인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방식도 달라진다”라는 “사피어 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은 영화 속에서 중요한 장치 중의 하나인데,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워가면서 주인공은 점점 더 헵타포드처럼 사고하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작용’이나 적분에 의해 정의되는 다른 것들처럼 헵타포드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207쪽)
인간은 선후를 따라 사고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이용해 현재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자유의지가 있다면 미래를 알 수
없다. 미래를 알 수 없을 때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용해 자신의 현재를 선택한다.
하지만 헵타포드는 다르게 사고한다. 각 명제들 사이의 관계에 고유한 방향성은 존재하지 않고, 특정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사고의 맥락’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에 관여된 모든 요소의 힘이 동등하고, 모두가 동일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204쪽) 목적론적 사건 해석은 최소화 혹은
최대화라는 목적에 달성하기 위해 이루어지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 상태를 알아야
한다. 헵타포드는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대한 지식을 소유한다.
(207쪽) 마치 헵타포드의 문자에서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197쪽)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는 모습이 소설 속에서도 효과적으로 그려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상황을 그리기에는 영화가 좀 더 적합한 매체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영화의 방식이 조금 더 정교했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을
나서며 내가 사건의 순서를 거꾸로, 그러니까 과거와 미래를 역으로 이해했음을 딸롱이에게 확인받고 나서
더욱 확신하게 된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