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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의 과학공부 - 철학하는 과학자, 시를 품은 물리학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7월
평점 :
저자는 양자역학을 전공하는 물리학자이면서 대중의 과학화와 과학의
대중화에 애쓰는 저술가이기도 하다.(추천의 글, 도서평론가
이권우) 과학관련 책들은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 읽기가 어려운데, ‘과학도
교양이 될 수 있다는 유쾌한 증명’에 도전한 책답게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과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정치, 권력, 신화와 공포를 벗어나고자 하는 과학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양자역학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진 대로 어려운 과학 지식도 쉽게 풀어 설명해주는 것이 이 책의
최고 강점이다.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한 언급은 상식은 물론 과학적 접근방식을 초월한 이해 불가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글쓴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과학 분야에서 나의 최대 관심사는 우주의 시작과 인간의 진화에
대한 것이다. 무신론적 진화론자의 입장에서 아직도 ‘신’과 ‘신의 존재’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처럼 보일테지만, 우주의 시작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건
‘신’을 부정하다 못해 증오하기까지 하는 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우주가 시작되는 순간에 대해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체와 먼지의 거대한 덩어리가 자체 중력으로 급속히 붕괴하면서 점차 빠른 속도로 회전함에
따라, 혼돈과 같이 불규칙하던 구름이 점차 질서 정연한 얇은 원반형 구조로 변해 간다. 그 원반의 한가운데 부분은 짙은 진홍색으로 물들어 간다. (41쪽)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초기에는 모든 것이 뒤범벅이고 혼돈에 빠진 것처럼 보이던 태양계가 차츰 질서 있고 단순하고 규칙적인 상태로 변해 간다. 그리고 각 행성의 궤도는 눈에 띄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간다. (47쪽)
왜 시작이 기체와 먼지인가 라는 질문보다 이 기체와 먼지가 어디에서 왔는가가
더 커다란 의문이다. 그 전에는, 아니 그 전에는, 이 기체와 먼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이 기체와 먼지에
대해, 즉 우주의 시작을 밝혀줄 그 기체와 먼지의 근원에 대해 과학은 대답하지 못 한다. 마찬가지다. 무질서가 질서로 변모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궁금한 건 특정한 힘이 작용하지 않고도 어떻게 이러한 무질서가 질서로 변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행성의 궤도가 눈에 띄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스스로’ 일어난 것인가의 질문에는 그 대답을 얻지 못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저자는 아주 소탈하게 말한다. “솔직히 나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빅뱅이론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나오는 질문. 첫째,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물론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간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조차도 없었다는 말이다. 솔직히 나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의 물리학자들도
비슷할 거다. 둘째, 우주가 팽창한다면 어디로 팽창해가나요? 우주 바깥에 빈 공간이 있다는 말인가요? 이미 이야기했듯이 우주에는
바깥이 없다. 그냥 우주 전체가 팽창하는 거다. 풍선에 바람을
불면 풍선 표면이 점점 팽창한다. 풍선 표면에는 경계가 없다. 차를
몰고 여행을 떠나보라. 어디가 지구의 끝인가? 경계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지점 사이의 거리가 늘어났을 뿐이다. 우주는
이런 식으로 팽창한다. (35쪽)
<교육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다>라는 꼭지에서는 과학자의 글을 읽으면서, ‘행복’과 ‘교육’ 혹은 ‘행복한 교육’ 아니면 ‘그냥
행복하게 살기’에 대해 생각해보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학습’이 어떻게 생명의
위대한 발명품인지에 대한 설명도 유익했다. 사람마다 그 정의가 다를 수 밖에 없는 행복. 그래서 내 아이라 하더라도, 내가 그 아이를 낳았다 하더라도 아이의
행복은 아이 스스로 정해야 한다는 과학자의 주장이 무척이나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내가 온종일 물리를 공부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동의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 교육한다면 이미
뭔가 잘못된 거다. 왜냐하면 그 행복이란 당신이 정의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무언인지는 아이가 직접 결정해야 한다. 동물들이 그러하듯, 결국 인간에게도 교육의 목적은 아이의 독립이다. 행복한 삶을 정의하고
그것을 찾는 것은 부모, 교사, 사회의 몫이 아니라 바로
아이 자신의 몫이다.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69쪽)
<1990년, 그 여학생>은 흥미로운 제목과는 달리 ‘시간’에 대해 설명하는데, 글자는
따라 읽어도 이해는 되지 않는, 그럼에도 계속 흥미로운 글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나름 즐거웠다.
등속운동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정지해
있다고 생각한다. 운동은 상대적인 거다. 내가 우주 공간에
있다고 해보자. 내가 보기에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친구 우주인이 있다. 그 친구 입장에서는 자신이 정지하고 내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물리적으로
둘 다 옳다. 여기까지는 갈릴레오도 알고 있었다. 자, 이제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내가
보기에는 친구의 시계가 느리게 가고, 친구가 보기에는 내 시계가 느리게 간다. 누가 옳은가? 둘 다 옳다. 대개
이쯤에서 사람들이 미치기 시작한다. (84쪽)
<우주의 침묵>에서는 아직까지 우주에서 다른 문명의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는데, 그것 역시 아주 흥미롭다.
첫째, 생명이나 문명이 있더라도 완전 고립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인간이 보낸 탐사선 가운데 가장 멀리
간 보이저 1호는 2012년 태양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35년을 비행한 후였다. 이대로
10만 년(!)을 계속 더 진행해야 알파 센타우리에 도착한다. 그러면 인간은 비로소 우주에 존재하는
1,000,000,000,000,000,000,000,000 (0 세개가 8번)개 별 가운데 가장 가까이 있는 하나를 탐사하는 것이다. 전파를 보낼
수도 있지만, 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엄청난 세기로 보내지 않으면 우주 잡음에 묻혀버린다. 우주는 너무 광활하여 인간의 과학기술 정도로는 고립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둘째, 문명이 있었으나 사라져버렸다. … 문자가
발명되고 나서 불과 5,000년 만에 우리는 자멸하기 충분한 과학기술을 가지게 되었다. 문명은 순식간에 일어나서 스스로 멸망하는 속성을 가진 걸까? (54쪽)
아직 지구 안에도 인간이 모르는 생명체가 존재할지 모른다. 끊임없이 연구하게 하고 또한 놀라운 결과물을 보여주는 건 바로 인간일 수도 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우주. 팽창하는 우주 속, 여기 구석 중의 한 쪽 구석. 여기에 우리가 산다. 우리 인간. 가끔은 미워하기도 하고, 또 가끔 사랑스럽기도 한 바로 내 옆의 인간 그리고 인간들. 우주의
아이이며, 별의 먼지이기도 한 이 인간, 이 인간들에게 이제
밥을 차려 주어야겠다.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는데도 시간이 느리게 간다.
상대성 이론은 초등학교 겨울방학에는 해당되지 않는가 보다.
주변에 무언가 물질이라 부를 만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 자체로 기뻐해야 한다. 생명체는 지구에서만 발견되는 아주 특별한 물질이다. 내 주위에 생명체가 있다면 이것은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그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나와 같은 종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다른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론적
이유이다. (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