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표백
이 책은 이사를 앞두고 읽었다. 이사업체 아저씨들은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을 그대로 옮겨 주시기에 버릴 것은 미리 버려야 했지만, 그 정리의 길이 너무 멀고 멀어. 나는 책을 읽었다.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신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 때까지의 세계사는 바로 이것에 불과한 거야. ··· 만인을 위한 구원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최초에 그것을 자각한 자는 반드시 자살해야 한다.” - 『악령』, 도스토옙스키
『표백』은 ‘자살’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대학친구 세연이 대기업 취업 후에 자살한다. 5년 후 ‘나’는 죽은 세연의 메일을 통해 와이두유리브닷컴whydoyoulive 사이트를 알게 되고, 대학에서 같이 어울렸던 친구들이 순차적으로 자살을 실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죽으려는 사람과 막으려는 사람. 죽으려는 이유와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
어떤 책보다도 자살에 대해, 자살하려는 이유에 대해, 삶의 희망없음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근래에 가장 핫한 작가 중의 하나인 장강명의 데뷔작인데, 이런 소설을 왜 이렇게 늦게 만났나,하는 생각에 스스로의 게으름을 탓했다. ‘위대한 삶’에 대한 동경, 뻔한 일상에 대한 회의, 시시한 삶에 대한 조롱 앞에서 오래도록 생각했다. 내가 동경했던 위대한 삶에 대해,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은 삶 ― 위대한 삶 ― 에 대해 생각했다.
“그럼 뭐가 위대한 일이지?”
“아무도 전에 시도하지 못했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 그 일 이후에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무시할 수는 없게 되는 그런 일. 진화론이나 상대성이론 같은 것.(69쪽)
2.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이 책은 이사를 마치고 읽었다. 이사 전에는 어수선한 집안처럼 마음이 어수선해 마음이 불편했는데, 정리가 끝나지 않았지만 일단 ‘이사’를 마쳤기에 마음은 의외로 편안했다. 정리되지 않은 짐을 거실 한 가운데 잔뜩 쌓아놓고 ‘나 몰라라’의 심정으로 읽었다.
저자는 곤도 마리에, 일본 최고의 정리 컨설턴트이다. 정리에 대한 저자의 믿음과 찬탄은 책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 저자의 의견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지만, 정리에 대한 팁들은 도움이 될 만하다.
크게 두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물건을 버릴지 남길지 결정하는 것’과 ‘물건의 제 위치를 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29쪽)
무리 없이 버릴 수 있는 물건의 종류를 난이도에 따라 열거해 보면 의류,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 순이라 할 수 있다.(65쪽)
옷장에 옷을 걸 때, 종류별로는 왼쪽부터 코트, 원피스, 재킷, 바지, 스커트, 블라우스 순으로 걸면 된다.(105쪽)
소품은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해서 정리하기 복잡할 것 같지만, 다음과 같은 순서대로 정리하면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CD·DVD류 → 스킨케이용품 → 메이크업용품 → 액세서리류 → 귀중품류(인감, 통장, 카드류)→ 기계류 (디지털카메라, 코드류 등 전기 관련 물건) → 생활용구(문구, 재봉 도구 등) → 생활용품 (약류, 세제, 티슈 등의 소모품) → 주방용품, 식료품 → 그 외 용품(137쪽)
정리의 시작은 물론 버리기다. 버리지 않으면, 정리는 하나마나다. 최신 수납 도구를 활용해 아무리 체계적으로 수납한다 해도, 정리는 아니다. 다시 제자리다. 그래서 정리의 시작은 버리기고 어쩌면 마지막도 버리기다. 어떤 물건을 버려야 할지 가지고 있어야 할지를 결정할 때, 저자는 직접 물건을 ‘만져보라’고 제안한다. 물건을 만졌을 때, ‘설레인다’면 그 물건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되지만, 그런 설렘 없이 ‘나중에 필요할지도 몰라’라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면 그런 물건들은 가차 없이 버리라고 말한다. 설렘이 없는 물건이라면... 버려야 할 물건들이 많다. 산처럼 쌓여 있다.
책을 읽다가 동의하기 어려운 구절은 ‘책’과 관련된 저자의 의견이다. “지금 나는 갖고 있는 책이 30권 정도로 항상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122쪽)” 혹은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은 책들을 가지고 있는데, 3권은 정말 적은 편이고, 많은 경우는 30권 이상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118쪽)”.
많은 경우에 30권이라니. 알라딘 서재에서는 책값 때문에 가정 경제가 어려워진 경우는 기본이요, 1년 동안 책 한 권 사지 않아도 읽을 책이 쌓여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저자에게는 책도 옷과 다른 생활용품처럼 정리의 대상이기에 ‘책은 30권’ 정도만 가지고 있다는 건데,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3.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이 책은 1982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었고, 정원을 가꿨고, 십자말풀이를 했고, 자신의 재산을 보호했다. 서른여덟살에, 벌써 은퇴한 듯한 기분을 약간 느꼈다.(16쪽)
평범하지만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아가던 역사학자 그레이엄은 앤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 영화배우였던 아내가 영화 속에서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뒤에, 그녀의 과거와 그녀의 남자들에 대한 질투에 사로잡힌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내의 정사. 돌이킬 수 없는 아내의 과거. 아내에 대한 집착과 사랑. 그리고 파멸.
그의 아내가 스크린 상에서 간통을 범한(스크린 밖에서는 하지 않은) 남자 배우들이 출연하는 다른 영화들과, 그의 아내가 스크린 밖에서는 간통을 범한(스크린 상에서는 하지 않은) 남자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가 있었다. (136쪽)
그레이엄이 선택하는 영화는 이렇게 두 개로 나뉜다. 아내가 스크린 상에서 간통을 범한 남자 배우들의 작품과 아내가 스크린 밖에서 간통을 범한 남자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 사랑하는 아내를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은 남자의 욕망은 그녀의 과거와 과거 속 남자들에 대한 질투로 인해 그의 현재를 속박한다. 아내의 과거 속에 존재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해 절망하고, 그녀의 과거를 소유할 수 없음에 한탄한다. 그녀를 더 사랑하게 될수록 질투의 감정은 증폭된다. 오셀로의 현대판이라는 평가가 전혀 부족하지 않다. 지독한 사랑 이야기. 그레이엄의 뜨겁고 허탄한 사랑에 위로를 전한다.
4. 다른 색들
행복해지기 위해 나는 매일 일정량의 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매일 약을 한 수저씩 복용해야 하는 화자들 있잖습니까 ······. 내게 문학은 약처럼 필요한 존재입니다. 수저나 주사로 투여하는 약처럼 매일 ‘복용’해야 하는 문학은, 마약 중독자처럼 어떤 특성과 의미 있는 일정한 농도가 있습니다. (14쪽)
약과 주사는 근래의 정국에서 반감을 일으키는 단어들이다. 주사 앞에는 태반, 백옥, 마늘 등이 붙어 있는데, 그 효과에 대해서는 각 개인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겠지만, 이런 주사에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그에 중독된 사람의 팔을 상상해보라. 그리 유쾌하지 않다.
오르한 파묵은 말한다. 나는 매일 일정량의 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문학에 대한 내 의존성도 나를 ‘반쯤 죽은’ 상태로 만듭니다. 나는 문학을 약이나 주사처럼 매일 ‘복용’해야 합니다. 이런 중독이라면 근사하지 않은가, 이러한 중독이라면 빠져도 괜찮지 않은가, 자신에게 이런 중독 증세가 있음을 자랑해도 되지 않는가. 하지만...
독서는 또한 자기 자신이 심오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책을 읽을 때, 우리 이성의 일부는 읽고 있는 텍스트에 온전히 몰입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고 있는 일, 그러니까 독서가 얼마나 심오하고 영리한 일인지를 떠올리며 자신을 대견하게 여긴다. 우리 영혼의 일부는 읽고 있는 책보다는 앉아 있는 책상이나 책, 빛을 반사하는 전등, 앉아 있는 정원 혹은 풍경에 열려 있다고 프루스트가 설명한 적이 있다. 이런 집중에는 자신의 외로움이나 상상력의 가동,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보다 ‘심오’하다는 것을 기뻐하는 면도 있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해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를 자랑스럽게 과장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175쪽)
책을 읽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세계와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갖게 되고,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틀 혹은 내놓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갖게 된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탐구야말로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인간적인' 사람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정보와 지식이 '지혜'로 이어지는 것에도, 나는 조금 회의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공고히 하기위해 읽는다. 같은 내용의 같은 책을 읽고도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는 건 무조건 좋은 일이야’라고 영혼 없이 말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게 반드시 좋은 일인가, 모두에게 그러한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다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것만이 의미 있다거나, 그것이 인간의 다른 모든 활동 중에서 최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감동받는 때는 어떤 일에 대한 바르고 정확한 해석이나 설교를 들었을 때가 아니다. 따스하게 잡아주는 손, 등을 두드리는 부드러운 손길, 따뜻한 밥 한 그릇, 다정한 눈인사.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오르한 파묵은 말한다.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해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것은 이해하나 이를 자랑스럽게 과장하는 것은 별로다.
책을 좋아하고 책읽기를 즐기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면서도 자랑스럽게 과장하지는 말고.
읽고 배우고 알아가되, 다정한 사람이 되자.
이게 오늘, 내 목표다.
읽고 배우고, 다정한 사람이 되자.
다정한 말을 하자.
다정하게,
다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