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의 『윌리엄 트레버』에는 「그 시절의 연인들」외 22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나는 책 뒤에 일부가 소개되어 있는 「페기 미한의 죽음」을 제일 먼저 읽었다. 사실, 이 한 편만 읽었다.
일곱 살의 ‘나’는 파슬로 사제와 난생 처음 영화를 보러 간다. 영화는 키스하는 어른들과 지진과 자동차 사고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에게 키스를 엄청나게 많이 받던 여자 주인공은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그 날 밤,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는 어머니 옆에서, 낮에 본 영화를 생각하던 ‘나‘는 상급반의 예쁜 여자아이들 클레어와 페기 미한을 떠올린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는 클레어와 페기 중 한 명이 내 친구이기를 바랐다. 나는 영화 속 배우들이 사랑한 것처럼 둘 중 한 명을 사랑하고 싶었다. 둘 중 한 명과 키스하고 둘 중 한명과 같이 있고 싶었다. 단둘이서. 침실을 가득 메운 어둠 속에서 클레어와 페기는 둘 다 가깝게 그리고 정말 내 앞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280쪽)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 예쁜 여자 아이들, 어머니보다 훨씬 더 예쁜 여자 아이들을 떠올린다. 금발에 주근깨가 살짝 난 클레어와 클레어보다 어리고 머리칼이 까만 페기 미한. 둘 다 바로 눈 앞에 존재하는 것처럼 아주 가깝다. 하지만, ‘나’는 둘 중 한 명하고만 친구가 되어야 한다. 둘 중 한 명하고만 사랑해야 한다. 둘 중 한명하고만 키스해야 한다. 처음 본 영화, 태어나서 처음 본 영화에서 배우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단둘이만 있어야 한다. ‘나’와 클레어, 페기 미한, 셋이 함께 있을 수는 없다. ‘나’는 클레어를 선택한다.
한 주 두 주 그리고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내가 극장에 다녀온 날 밤에 상상했던 이야기를 점점 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특히 페기 미한이 차에서 어떻게 떨어졌는지, 숨이 끊어진 페기가 어떻게 보였는지를 또렷이 기억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품은 생각 중에 가장 사악한 것이라고, 신성모독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그렇지만 동시에 신성모독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밤이면 침대에 누워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려고 절망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용서를 얻지 못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모습들은, 살아 있을 때의 페기의 얼굴과 죽은 뒤의 페기의 얼굴은 잠시도 내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죽은 뒤의 페기의 얼굴은 영화 속 여자의 얼굴과 같았다. (281쪽)
간절히 원했던 일이, 상상했던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달처럼 멀리 있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꿔왔던 일들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기쁠까, 얼마나 행복할까. 이 단편은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준다. 저주했던 사람이 사라져버렸다. 없어졌으면 했던 사람이 죽어버렸다. 상상 속에서 죽였던, 죽여 버렸던 그녀가 진짜 죽었다. 그의 상상이 그녀를 죽였다. ‘나’의 상상이 ‘페기 미한’을 죽였다.
한 순간의 부주의한 환상 속에서 나는 페기의 죽음을 바랐고, 이미 죽은 페기는 살아 있는 내 생각을 지배했다. 나는 페기의 죽음을 바라지 말았어야 했다. 중년에 접어든 페기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는 뚱뚱한 매든 부인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아름답다. (284쪽)
나는 단편보다는 장편을 좋아하고, 세계 문학 단편선은 『대실 해밋』, 『대프니 듀 모리에』, 『플래너리 오코너』 전부 다 읽기에 실패했는데...
윌리엄 트레버라니...
아, 이제 22편 남았다.
아껴서 읽으리.
시대가 엄중하니, 아껴서 읽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