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계획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아 특별할 것 없는 나의 독서 여정에, 큰애의 책상에 꽂혀있던 이 책이 합류했다.
갑자기 생각난다. 내 친구 ㅁㅈ이. 고등학교 2학년. 꿈 많고 웃음 많던 시절. 독어 문과반. 여고생 교실.
ㅁㅈ이는 뒤쪽에 앉았는데, 항상 피곤해 보이는 외모가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머리를 풀어헤쳐서 그렇지 않았을까. ㅁㅈ이 자리 밑에는 사과 박스보다 조금 작은 박스가 두 개 있었고, 그 안에는 크기가 작아 한 손에 들어오는 10대를 위한 ‘로맨스 소설’이 가득했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ㅁㅈ이의 로맨스 박스는 ㅁㅈ이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녔고 책들은 박스 위로 한껏 넘쳐났기에 교실 여기저기를 방황하는 ㅁㅈ이의 책들을 볼 수 있었다. ㅁㅈ이는 집에 그런 책이 몇 박스나 더 있다고 했다. ㅁㅈ이가 어느 자리로 옮기든, ㅁㅈ이의 자리가 우리 반 무료 도서 대여점 자리였다. 나는 ㅁㅈ이를 통해 ‘풀하우스’의 라이더를 알게 됐다. 라이더는 사랑이다.
아무리 라이더가 사랑이라 해도, 로맨스 소설은 읽지 않았는데, 그 때는 로맨스 소설을 하찮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뻔한 스토리, 뻔한 이야기, 뻔한 결말. 이런 식으로. 나는 그런 건 읽지 않아,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ㅁㅈ이의 도서 대여점이 하도 성황을 이루다 보니 나도 모르게 관심이 생기는 거다. 그래! 한 권은 읽고 이야기해야지, 읽고 나서 판단할 수 있는 거야, 라는 웬 쓸데없는 변명을 앞세우고 ㅁㅈ이에게 간다.
ㅁㅈ아, 나도 한 권 빌려줘!
그래? 음... 너 처음이지? 잠깐만... 그럼.... 이거 읽어라.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그 어떤 한 권.
뭐, 내용은 비슷비슷해. 다 거기서 거기야. 그래도 그게, 입문편이야. 정석이긴 한데, 재미있을 거야.
ㅁㅈ이에게서 한 권을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빛의 속도로 독파! 아, 이렇구나. 이렇게 빨리 읽을 수 있구나. 이렇게 재밌구나. 그래서 그렇게들 읽는 거구나.
책을 들고 ㅁㅈ이에게 간다.
ㅁㅈ아, 나 다 읽었어. 고마워.
응, 재밌지? 다음꺼 빌려줄까?
아니, 아니.... 나, 안 읽는 게 좋겠어. 너무... 너무 재밌어서, 더 읽으면 막... 빠질 것 같애.
그래, 그렇긴 하지. 근데 뭐, 다 거기서 거기야. 뻔하지. 읽지 마~~~
암튼, 고마워.
생각난다, ㅁㅈ이. ㅁㅈ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친구야, 잘 지내고 있니~~~
사랑이라고 한다면, 일단은 ‘감정적’인 측면을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마음이 설렌다’고도 하고, ‘가슴이 쿵쾅거린다’고도 한다. 말이 많아지기도 하고, 말이 적어지기도 한다. 오버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한다. 사랑의 대상, 특히 잘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이런 사랑의 감정이 생길 때, 그런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진격해 올 때, 애달픈 우리 인간 사람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른다. 혼란스러워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뱀파이어 에드워드는 새로 전학 온 벨라의 생각을 읽을 수 없어 당황스러워한다. 처음에는 자신을 해하려 찾아온 악마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매력적인 대상에 대한 감정적 소용돌이 앞에서 무력한 인간, 아니 무력한 뱀파이어.
“But I resisted. I don't’ know how. I forced myself not to wait for you, not to follow you from the school. It was easier outside, when I couldn’t smell you anymore, to think clearly, to make the right decision. I left the other near home ― I was too ashamed to tell them how I weak I was, they only knew something was very wrong ― and then I went straight to Carlisle, at the hospital, to tell him I was leaving.” (270쪽)
도망가려는 뱀파이어. 도망을 가다 가다 알래스카까지 간다.
By the next morning I was in Alaska.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한다,고 느낀다.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 눈에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나와 다른 점에 매력을 느낄 수도 있고, 나와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마음을 열 수도 있다. 내가 궁금해하는 건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태도를 ‘첫 눈에 반한 상태‘에만 한정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어제 읽었던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에서 작가는 새로 사귀게 된 사람에게 ’내 사랑의 유효기간은 3개월‘이라고 미리 말한다고 썼다. 그렇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 보통이 6개월이다. 3개월이니 이작가는 조금은 짧은 편이라 할 수도 있겠다. 3개월의 이작가는 첫 번째 글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으면서‘에서 사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조금 변하고 있음을,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랑의 의미가 확장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고등학교 때 로맨스 소설을 딱 한 권 읽고, 그리고 10대를 겨냥한, 10대에 봄직하다는 이 소설을 이제야, 이제서야 읽는다. 재미있다. 우앗! 재미있다. 에드워드는 불타오르는 강렬한 눈빛을 발사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살인 미소를 날린다. 벨라는 자주 깜짝 놀라고 에드워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한다.
읽다보니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별그대 외계인 도민준씨가 자꾸 겹쳐져 둘이 얼마나 비슷한지, 그런 것들을 헤아려 보게 된다. 아... 이 무슨 쓸데 없는... 탄탄한 경제력, 전방위적 지식, 빛처럼 빠른 속도, 가공할 만한 위력, 상처에 대한 놀라운 재생력, 치명적인 미모, 링클 프리 자동 노화 방지 시스템, 이에 더해 하트뿅뿅 여주의 마음을 한껏 밀어낸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다만 도민준씨가 조선시대 건강 밥상으로 정갈한 식사를 할 수 있는데 반해 에드워드는 동물의 피를 구하기 위해 몸소 사냥을 해야한다는 점에서는 도민준씨가 유리하고, 에드워드는 그래도 사랑하는 여자에게 조심하면서 키스 정도는 할 수 있는데 반해, 도민준씨는 키스 한 번에 기절 내지 졸도니 그런 면에서는 에드워드가 낫다고 하겠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최고의 배우라고 한다면 어떤 각도에서도 예쁘게 잡혀야 한다. (이건 연기력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냥 말 그대로 화면빨, 그 자체를 의미하는 거다) 그런 면에서 로버트 패틴슨은 최고의 배우라고는 할 수 없다. 어떤 각도에서는 그냥 그렇다. 그런데, 이런 몇 개의 각도, 몇 개의 사진은.
아하... 그래, 그래서 네가 에드워드구나, 할 수 있게 해준다.
아, 에드워드...
2권에서는 제이콥과의 삼각관계가 시작된다던데, 흐흐흐. 절로 웃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