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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었습니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77
이덕규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시인 이덕규는 1961년 화성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밥그릇 경전』등이 있다. <알라딘 저자소개>
처음 읽는 이덕규 시인의 시집이다. 마음을 건드린 2개의 시 중에, 「죽자 죽자 죽어버리자」을 옮겨본다.
죽자 죽자 죽어버리자
코밑이 거뭇해지던 늦은 겨울 이야긴데요 산속으로 솔방
울 주우러 갔을 때 일인데요
인근 야산엔 겨우내 사람들 발길이 잦아서 좀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다가 한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는데요
저걸 봐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아버리고 말았는데요
양지바른 산소 풀 위에 낯선 남자하고 이웃 마을 혼자 사
는 친구네 엄마하고 꼬옥 부둥켜안고 있었는데요
한동안 나는 거기서 꼼짝 못하고 뜨거운 손에 쥔 솔방울
하나를 다 부숴버리고 말았는데요
그런데요 친구 엄마는 울고 남자는 달래느라 나지막이 속
삭이는 소리가 생솔나무 가지를 타고 내려와
내 귓속에까지 생생하게 흘러들어왔는데요
마침내는 서로 흐느끼면서 죽자 죽자, 우리 같이 죽자, 하
염없이 울고 또는 소리가 들려왔는데요
그날 늦은 저녁까지 나는 산속을 헤매다니며 죽자 죽자 솔
방울을 마구 주워댔는데요
땅이 푹푹 꺼지듯, 무겁고 긴 한숨이 흘러내려와 내 작은
가슴을 짓누르며 두방망이질 치던 그 말,
죽자 죽자, 우리 같이 죽자는 그 말을 부대 자루 가득 담
아 메고 이미 어둑해진
겨울 산을 으슬으슬 내려섰는데요
그러니까, 그날이후 며칠 동안 깊은 신열을 앓으며 깜박
깜박 죽었다가 깨어나서는
비몽사몽 관자놀이에 검지를 대고 수없이 방아쇠를 당겼
는데요 누군지도 모를 먼 사람에게
속삭이듯, 나지막이
죽자 죽자 죽자, 우리 같이 죽어버리자는 것이었는데요
여성의 순결만큼 중요한게 여성의 정조이다. 여성의 정조보다 더 우위에 있는 건 ‘어머니’의 정조이다. 그래야만 하는 당위를 깨뜨려버린 장면을 목격한 ‘나’는 털썩 주저앉는다. 손이 뜨거워지고 들고 있던 솔방울을 한 손에 부숴버리는 이유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성은 그래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되고, 친구의 어머니도 그래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함께 있으면 안 되는 두 사람이 깊은 산 속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을 목격한 ‘나’는 며칠 동안 깊은 신열을 앓게 되는데, 그건 두 사람이 나눈 말 때문이었다.
죽자 죽자 죽어버리자.
만약 그 말이 사랑한다,였으면 어땠을까.
만약 그 말이 도망가자,였으면 어땠을까.
사랑한다,였다면 두 사람을 미워할 수 있었으리라. 짐승처럼 이끌린대로 이끌려버린 사랑놀음이라고 욕할 수 있었으리라. 더러운 사랑이라고 조소하고 두 사람의 사랑을 경멸했으리라.
도망가자,였다면 두 사람을 멸시할 수 있었으리라. 무책임하게 인간의 도리를 버렸다고 비웃을수 있었으리라. 도망가서 시작하게 될 두 사람의 사랑을 저주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울고 있는 여자를 달래던 남자의 말은 사랑한다,도 도망가자,도 아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끼며 두 사람은 말한다.
죽자 죽자, 우리 같이 죽어버리자.
이제 여기서, 이 곳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도망가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지만, 이것 또한 두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렇다고 이 사랑을, 찾아온 사랑을 포기할 수도 없다. 사랑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죽음을 이야기한다. 죽음으로만이 이 사랑을 이길 수 있고, 죽음으로만이 이 사랑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코밑이 거뭇해 사랑에 눈뜨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뜨거워 솔방울을 다 부숴버리던 ‘나’는 누군지도 모를 먼 사람에게 자꾸만 이렇게 말한다.
속삭이듯, 나지막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죽자 죽자 죽자, 우리 같이 죽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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