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 유혹적인 가격이 구매의 결정적 요소가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막상 책을 받고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여러 작가들의 단편 뿐 아니라, 정성 들여 편집하고 사진을 고른 흔적이 역력하다. 제일 먼저 읽고 싶었던 표지 이야기, 천명관의 인터뷰를 읽는다.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에 대한 이야기에서 멈칫 멈춘다.

정 소설가로서 사회적 의식이나 공적인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는 편인가?
천 지식인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예술가의 자의식도 없다. 그러니 그런 거창한 책임감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젊을 땐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도 많았지만 텔레비전 뉴스를 안 본 지 칠 년이 넘었다. 지금은 내 삶을 꾸려가기에도 벅차다. 나이를 먹어가고 몸도 예전 같지 않다. 죽음이 아득히 멀리 있지 않다는 감각도 생겨났다. 나는 철저히 개인으로 살 뿐이고 가능한 한 그러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최소한의 윤리적 삶이라고 생각한다.
정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나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말인가?
천 굳이 대답하자면 이런 마음은 있다. 부자들을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나에겐 작가로서 최소한의 윤리 같은 것이다. (95쪽)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만 했던 작가들이 있었다. 엄존하는 세상 앞에서 펜 하나로 불의한 현실에 마주 섰던 작가들 말이다. 지금도 그런 작가들이 있다. 시어 고르는 일에 전념해야 할 시인들이 경찰버스 위에 오르고, 이야기를 엮어야 하는 소설가들이 팽목항으로 향한다. 경찰버스에 오르고, 팽목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야 하는 상황, 그런 시대를 산다.
하지만, 나는 지식인이 아니다.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없다. 내게는 거창한 게 없다. 나는 철저히 개인으로 살 뿐이다,라고 말하는 예술가의 자의식 또한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철저히 개인으로 살아가는 예술가,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그런 삶을 그려내는 예술가 역시 우리에겐 필요하다.

‘신경숙 표절 사태’ 이후에 문단권력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문단만, 비판의 중심인 문단만 모른 척 할 뿐이다. 천명관이 제시하는 해법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라서 실제로 실현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등단제도, 청탁제도, 문학상을 모두 다 때려치우자고 하는데, 이미 거대 권력인 문단이 자발적 선택을 통해 이런 과정을 겪을 수 있을지. 한 달에, 아니 일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국민이 대다수인 나라에 사는 한 국민은 심히 걱정스럽다. 문단 스스로의 자정 노력과 독서 문화의 변화 없이는 이 상황의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처음 ‘신경숙 표절 문제’를 제기한 이응준도 그렇고, 천명관도 그렇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을 둘러싼 공기와 같이 자신의 일에, 밥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강한 논조로 변화를 촉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대단한 용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