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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잠깐 쉬는 시간을 갖자고, 내가 나를 꼬셔, 책장 앞에 선다.
진작에 ‘읽고 싶어요’의 범주에 들어 우리 집 책장에 꽂힌 책들 중, 자랑스러운 ‘읽고 있어요’와 명예로운 ‘읽었어요’의 전당에 들지 못하고 아직도 염치 없이 ‘읽고 싶어요’로 분류되는 책들을 돌아본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 김승옥의 『무진기행』, 소세키의 『갱부』를 앞에 두고 잠깐 고민에 잠긴다. 갈길이 멀어 엄마 찾아 삼만리인데(여기에서 엄마는 물론, ‘페미니즘’ 엄마씨이다), 이 와중에 장편이 웬 말이냐. 김승옥님 작품은 경건하게 이어서 읽어야 하느니. 단 번에 끝낼 수 있는 단편 중에서 골라라. 그렇다면 예전부터 찜해두었던 게 있다. 『필경사 바틀비』.
『필경사 바틀비』를 골랐다면, <필경사 바틀비>를 읽어야 할 테지만, 내가 읽은 단편은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다. 대학 때 읽었으니까, 이게 얼마만인가,라고 말하며 정확한 년수를 밝히지는 않으니, 내 나이를 짐작조차 하지 마시라.
<에밀리에게 장미를: A Rose for Emily>은 1930년 3월 30일자 포럼(Forum)에 발표되었고 첫 단편집 『이 13편』(These 13, 1931)에 수록되었다. 에밀리의 장례에서 시작하여 그녀 생애의 특정 국면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화법을 구사하며, 화자가 에밀리의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전개된다. (308쪽)
살아생전에 에밀리는 하나의 전통이자 의무이자 걱정거리였고, 시장이던 싸르토리스 대령 ― 흑인 여자는 앞치마를 하지 않고서는 길거리에 나와서는 안된다는 포고령을 만든 장본인 ― 이 그녀의 세금을 면제해준 1894년의 그날부터 마을에는 일종의 세습 채무이기도 했다. (310쪽)
에밀리의 아버지가 죽은 후 그녀에게 남겨진 게 집 한 채밖에 없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사람들은 에밀리를 동정할 수 있어 오히려 기뻐했다. 그리어슨 가의 마지막 후예로서 얼굴을 꼿꼿이 들고 다니던 에밀리는 몸집이 크고 검게 탄 민첩한 북부 출신의 십장 배런과 노란색 바퀴의 사륜마차와 한쌍의 적갈색 말을 몰고 다니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듯 했다(316쪽). 그녀가 보석상에서 품목 하나하나마다 H.B. 라는 이니셜을 새긴 은제 남성용 의복을 주문했음을 알고는 사람들은 그들의 결혼이 임박했음을 알았다.(319쪽)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호머 배런도, 에밀리도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장바구니를 들고 들락날락하던 흑인 하인의 머리가 점점 세어가고 등이 굽어갔지만, 에밀리는 그대로였다.
그렇게 에밀리는 세대에서 세대로 양도되었다 ― 소중하고, 피할 수 없고, 무감하며, 차분하며, 외고집인 존재로서. (321쪽)
하나의 전통이자 의무로 세대에서 세대로 양도되었던 에밀리, 그녀가 죽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고 나서야 층계 위쪽 닫혀 있는 방에서 사라졌던 그 남자, 호머 배런이 나타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떠난다고 할 때, 그 사랑 없이, 그 사람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말없이 고이 보내드려야 할까,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날 것이라 저주해야 할까.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배런과 에밀리. 이별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은 확연히 다르다. 배런은 그녀를 사랑하지만 헤어져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에밀리는 배런을 사랑하기에 잠시도 떨어져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혹 배런은 이제 그녀와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에밀리는 그와 헤어진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배런과 에밀리의 차이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즉, 배런이 에밀리를 덜 사랑했다거나, 에밀리가 배런을 더 사랑했다는게 아니다. 배런에게 에밀리는 ‘선택의 문제’지만, 에밀리에게 배런은 ‘생사의 문제’이다. 배런은 에밀리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테지만, 에밀리에게 배런 없는 세상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세계일 뿐이니 말이다.
지고지순한 사랑, 지독한 사랑, 그보다 더한 이런 끔찍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스토커다. 사건은 배런이 자신을 향한 에밀리의 이런 간절한 열망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데서 시작되고 그리고 거기서 끝난다.
떠나려는 애인을 막아서는 방법으로 에밀리는 배런이 자신의 방에서 영원히 잠들게 한다. 에밀리는 배런에게서 생명을 빼앗았다. 에밀리는 배런에게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았고,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았다. 에밀리는 배런에게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유를 빼앗으려 했겠지만, 그의 생명을 빼앗음으로 해서, 배런이 그녀를 사랑할 자유 또한 영영 빼앗아 버렸다.
결국, 그녀가 빼앗은 것은 그녀와의 사랑을 선택할 수 있었을 배런의 자유다. 그녀가 죽인 건, 연인 배런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해주었던 바로 그 사랑이다. 그녀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 그녀를 다시 살 수 있게 했던 바로 그 사랑 말이다. 배런이 죽음으로 해서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던 사랑도 이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찬장 아래칸 라면 한 봉지나 찬장 윗칸 예쁜 머그잔처럼, 잠시 배런을 소유한다는 것이 그녀에게 잠시 위로를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배고플때는 라면 한 봉지 마냥 반갑고, 예쁜 머그잔으로 마음 맞는 친구들과 커피 한 잔, 하면 우아할 테지만, 백골이 되어 버린 내 남자, 내 애인은 그냥 그렇게 누워있을 뿐이다.
배런이 침대 위에 고이 누워 버린 이후로 에밀리의 삶이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랑이 없으니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진배 없다.
사랑 없는 삶, 사랑이 죽어 버린 삶을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그녀에게 남겨진 건 그런 삶이다. 에밀리에게 장미를 줄 일이 아니다. 아니다. 장미라도 주어야겠다. 사랑을 영영 잃어버린 그녀에게 장미를 준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사랑을 모르는 그대,
그대는 사랑을 잃었군요.
사랑을 몰라
그 소중한 사랑을 잃었군요.
그대,
사랑을 모르는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