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건 모르겠고 재미. 사건과 사실의 기술, 조합의 어떠함 말고 그냥 '재미'의 측면으로 봐서, 나는 유발 하라리가 독보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창의성 혹은 참신성보다 책 전체를 끌고 가는 '재미적(?) 요소'가 그의 책을 줄줄이 전 세계에서의 초히트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 생각한다.
책 중간중간 제국주의에 대한 옹호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사피엔스』에서 내가 접어두었던 문단은 여기다.
그럼에도 인도라는 현대 국가는 대영제국의 자식이다. 영국인들은 인도 아대륙의 거주자들을 살해하고 부상을 입히고 처형했지만, 왕국과 공국과 부족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며 혼란스럽게 뒤섞였던 것을 하나로 통일하여 공통의 민족의식을 가지고 어느 정도 하나의 정치 단위로 기능하는 국가를 창조해냈다. 영국인들은 인도 사법제도의 초석을 놓았으며, 행정부 구조를 창건했고, 경제적 통합에 극히 중요한 철도망을 건설했다. 독립 인도는 영국에서 구현된 형태의 서구식 민주주의를 정부 형태로 받아들였다. 영어는 아직도 공용어로 쓰여, 힌디어, 타밀어, 말라얄람어를 쓰는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중립적 언어로서 쓰인다. 인도인들은 크리켓 경기를 매우 좋아하고 차를 열심히 마시는데, 둘 다 모두 영국의 유산이다. (『사피엔스』, 292쪽)
나는 이 문단 옆에다 이렇게 써두었더랜다. '친일파들의 논리'.
이번에 사피엔스 그래픽 히스토리, <Vol. 3 역사의 배후>에서는 인류 문명 발전의 주요한 요소들을 '인물'로 형상화하는데, 제국주의는 '레이디 엠파이어'로 표현된다. 그래픽에서는 이 부분을 사진 찍어 두었다.
탈식민주의 자체가 이미 식민주의 내에 포섭된 개념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의 답은, '말할 수 없다'일 가능성이 높다. 아스시 난디가 자신의 책 서문에서 밝혔듯이, 서구에 대한 비판이 서구의 언어로 이루어졌음을 지적한 부분은 그래서 특히 기억해 둘 만하다.
우리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서구에 대한 가장 맹렬한 비난이 싸르트르(Jean-Paul Sartre)의 우아한 문체로 쓰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구는 근대 식민주의를 창안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도 만들어냈다. 그 해석을 해석하고 있는 이 책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친밀한 적』, 서문, 21쪽)
나만, 우리만 특별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상황은 다른 나라의 상황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박태균 교수의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의 주장에서 착안했다.
침략자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바라보는 아프리카인들의 시선, 인도를 점령한 영국을 바라보는 시선, 남아메리카 지역을 침략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바라보는 피지배자들의 시선과 우리의 주권을 강탈한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그 성격이 판이하다는 지점. 침략과 침탈, 지배와 융합의 과정에서 식민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시혜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 식민 지배 하의 여러 민족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의 지배에 저항했고 그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피지배자들은 지배자들을 좋아하기도 했는데, 하라리가 강조하는 지점이 바로 그 지점이기는 하다.
우리는 아니었다. 일본의 왕족이 백제 출신이라는 주장은 이미 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단 한 번도 일본은 우리의 '동경'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한반도의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우리 나라의 식민화 과정과 독립을 위한 투쟁은 다른 나라들의 그것들과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의 항일성은 다른 존재를 향한다. (항일성, 한자로 써두어야 하는데.../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는 '항일성'이다) 우리는 미국, 백인들의 나라, 백인이 지배하는 나라 미국으로 향한다. 다스리는 자에 대한 숭모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적절하게 배합되었을 때에 최고의 효능을 발휘한다. 피식민인은 변화를 위해 '자발적으로' 지배자에게 융합되기를 원하고, 혼성의 완성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탈식민주의에 대해 읽게 될 때면 떠오르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시다. 고등학교 2학년 독일어 담당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에게서 배운 독일어는 모두 바람과 함께 사라져(구텐타그! 비게트에스이넨? 당케, 구트...) 버렸지만 선생님의 수업외 이야기는 또렷하게 남아있다. 잉여란 이토록 놀랍고도 강력하다. 틈만 나면, 선생님은 이 나라를, 구체적으로는 이 나라의 국민들을 비난하셨다. 무식하다, 경우가 없다, 말이 안 통한다, 성질이 나쁘다, 등등이었는데, 외국 생활을 하고 오신 선생님으로서는 한국, 한국인들의 그 어떠함이 훨씬 더 강렬하게 느껴졌을 거라 생각한다. 나로서는 선생님의 말씀에 상당 부분 동의하기는 했는데, 이야기가 반복되는 와중에 선생님이 미워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임을 그리고 선생님 '자신'임을 인식하는 순간부터는 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딱 한 번, 선생님께서 한국 사람들을 옹호하시는 발언을 하신 적이 있다. 선진국 사람들이 큰 바퀴 위에서 서서히 혹은 우아하게 바퀴를 굴려 가는 데 비해, 한국 사람들은 그 작은 바퀴를 가지고 부지런히, 악착스럽게 바퀴를 굴려야만 한다고. 세 번을 돌려야 그들이 한 번 도달한 그 지점에 닿을 수 있다고. 그런 상황에 대한 이해를, 혹은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시기는 했지만, 선생님의 자기 비하와 자기혐오는 오랜 시간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 중 일부는 내 속으로 들어오고, 결국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강대교를 건너는 검은 패딩의 기나긴 행렬을 찍은 화면을 나는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다. 이 사람들, 이 귀여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침이슬> 없이, <상록수> 없이, 결연함 없이, 그런 것 없이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탄핵봉을 들고, 결제 카드를 들고, 무료나눔을 들고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일까.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윤가가 과대망상과 편집증적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어떤 사람도 특정한 정신병리학적 징후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구든 이상하고, 누구든 과하고, 누구든 많이 부족한 면이 있다. 하지만, 윤가의 증세는 국가 전체의 안위를 맡기기에 너무나 중대하다는 것이 이번 비상 계엄 사태를 계기로 밝혀졌다. 2시간짜리 계엄이 어디 있느냐, 는 물음이 이를 보여준다. 원래의 계획은 계엄 상태를 수개월간 지속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것을 범법의 방패로 쓰는 이런 정신 상태는 가히 '일상'이 불가능한 정도다.
작은 아이가 아파 집회에 나가지 못했다. 엄마, 마음대로 해요. 가고 싶으면 가던지... 하는데 차마 발걸음이 안 떨어져서 가지 못했다. 대신 딸을 보냈다. 보낸 게 아니라, 스스로 가기는 했지만. 탄핵봉 없이 나가서 쿠키와 핫팩, 그리고 보조배터리를 받아가지고 들어왔다. 김밥 줄은 너무 길어 포기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환호성 가득한 현장 소리에 나도 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윤석열 시대를 마무리한 우리는 그런 자격이 있다고, 한강을 보유한 우리는 그래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마음고생, 몸고생, 우리 모두 수고가 많았다.
장하다. 내가, 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