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미즈의 글을 읽는다.

소설이 아니고, 응축해 놓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술술 읽어나갈 수 있다. 비교적 시간 순서에 따라 전개되고 있어서 따라읽기 딱 좋다. 1회독 뿐만 아니라 1권 이상 구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다. 짧지 않은 시간, 여성주의 책을 읽어오면서 나는 여러 번 생각했고 오랫동안 궁금했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나라가 여성혐오의 착실한 추종자였던 우리가 그 굴레를 '표면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었을까. 지금 우리가 '정상' 상태에 도달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작금의 상태, 전쟁 때보다 더 강렬하다는 0.7(2024년도 3분기)의 초저출산율은 개개인의 인식 변화의 진폭을 보여준다.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인식차, 남성과 여성 간의 인식차, 특별히 20대 남성과 여성의 인식 차이가 현재를 만들어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도 멀었다. 그게 전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나, 를 나는 궁금해한다.

인도에 사티가 있었다면, 우리에겐 열녀문이 있었다. 여성 폭력, 아내 폭력이 속담으로 박제되어 대대손손 전해지던 우리다. 가정 폭력은 주로 '주사'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조선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증언 중에 '술을 너무 마신다'가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은, 술-주사-가정폭력의 무한반복 결속을 보여주는 확실한 실례다. 그랬던 우리다. 우리는, 어떻게 그 상황을 넘어설 수 있었을까. 나는 전쟁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끔찍한 한국 전쟁의 결과로 모든 것이 '0'이 되어 버린 암담한 상황에서 신분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똑같이 출발선에 설 수 있었던, 예상치 못한 '불굴의 조건'이 이런 변화를 가능케 했다고 생각한다.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지점에는 언제나 교육이 자리한다.

우리 부모님은 학교에 한 푼도 낼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공립 학교는 수업료가 없었으며 자녀가 많은 가정의 기숙 비용은 정부가 부담했다. (75쪽)

다시 한번 행복한 우연이 나를 도왔다. 선생님이 오셨을 때 우리는 밭에서 순무를 자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리아, 프랑스인들이 트리어에 새 학교를 열 예정이란다. 지금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하면 4년 뒤에 졸업시험에 응시할 수 있어. 그 후에는 교육 기관에서 공부해 공립 학교 교사가 될 수 있단다. 관심 있니?" 물론 그랬다. (79쪽)

하녀 견습 과정을 거쳐 결혼이라는 사회적 기대를 거부한 산골 소녀 마리아 미즈에게는 행복한 우연이 계속된다. 그녀에게는 상급 학교에 진학할 기회가 열린다. 닫힐 듯하다가 다시 열리고, 또 다른 기회가 다시 한번 펼쳐진다. 만약 돈이 필요했다면, 주변의 여러 사람들보다 넉넉했으되 만약 돈이 필요했다면,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마리아의 부모님은 12명의 아이 중에 7번째 아이, 게다가 여자아이인 마리아의 교육을 중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돈이 필요 없었다. 수업료가 없었고, 자녀가 많은 가정이라면 기숙 비용을 정부에서 부담해 주었다. 프랑스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립 교사를 공급하는 것. 그리고 프랑스 점령 정부의 교육 체계를 독일에 이식시켜, 독일인들을 재교육시키려 했던 것.











조한혜정님의 『한국의 여성과 남성』에서는 제주 해녀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믿기 어려운 제주도 여성들의 삶이 한없이 펼쳐지는데, 그렇게나 고된 물질을 통해 생계를 책임지고, 아이들을 건사하며, 집에 돌아온 틈틈이 밭일을 계속하면서, 집안일을 전담하는 제주도의 여성들, 해녀들. 해녀들의 남편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조금 돌보는 척 하다가 제사 일에 신경 쓰는 척하다가, 아내에게 받은 돈으로 육지와 도시에 '작은 각시'를 얻어 집과 제2의 처소를 오가며 생활한다. 그렇게 살았다고들 한다. 해녀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던 이유는 그 일이 고되고 힘들어서뿐만 아니라, 해녀들이 '어머니-딸'로 이어지는 도제식 해녀 교육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 힘든 '물질'을 나에게서 끝내겠다는 그녀들의 결심. 딸도 자식이라는 그녀들의 말이 결국 해녀들의 삶, 그리고 제주도 풍경의 상당 부분을 바꾸었다. 탈출할 길, 해녀가 되는 삶에서 탈출하는 길은 교육, 상급 학교의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예전에 한 친구가 '영어 캠프' 이야기를 했다. 구에서 주관이 되어 진행하는 영어 캠프인데 프로그램이 너무 좋다고 했다. 자기 아이도 보내고 싶은데 가격이 너무 비싸 보낼 수 없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 아이는 못 가지만, 근처의 '한 부모 가정' 아이는 그 조건을 통해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보내지 못해 안타까운 친구 마음도 알지만, 혜택을 받는 아이로서는 다행이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속으로만 했다.










책이 여기에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마리 루티의 워딩을 기억해보면 이렇다. "소련 국경 근처의 시골에 살았던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던 나도 핀란드의 공교육 덕분에 치과의사의 딸과 동일한 교육을 받았다." 미국 브라운 대학, 파리7대학을 거쳐 마리 루티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그 후에 교수로서 가르친다.

지금은 좀 다르다. 전후의 한국과 지금의 현실은 달라져 있다. 모두가 '0' 점이라 거의 비슷해 보였던 출발점이 이제는 상당히 휘어져 있고, 그 현상이 고착화되고 있다. 나는 한국의 교육 문제가 임금 문제와의 연관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해결이 요원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일단 이쯤에서 접어두기로 한다. 문제는 교육이고, 해답 역시 교육이다.

교육이 전부라는 말이 아니라, 교육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결국은 다양성이 발현된 확률을 훨씬 더 높여줄 수 있다는 뜻이다.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입시 전형이 좀 더 확대되어야 하고, 구체적으로는 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 더 많은 메리트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재정 지급이 확대되어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대학 입시에서 'EBS' 교재의 전방위적 활용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대답하고 말았다.

내가 이 책, 지적으로 탁월하며 재미있고 유익한 이 책을, 지금 읽을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짜리 산골 소녀에게 결혼 말고 다른 가능성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배웠기 때문이다. 배우고, 갈고 닦았기 때문이다.

나도 이럴 때가 아니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근데, 안 늦은 거 진짜 맞나요? 마리아 언니 말씀.

나는 영어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예술만큼이나 언어도 어설프게 습득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연애편지의 영어에 만족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BBC 영어 강좌를 정기적으로 듣고 마침내 관련 시험에 응시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의 영어 인증서를 받았다.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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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2-18 1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교육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것이 넘 부럽더라구요!
지난달 읽었던 일본작가인 다나카 미쓰의 <생명의 여자들에게>와 너무 달라 놀라울 뿐입니다. 비교하며 읽기 너무 좋은데 마리아 미즈를 읽고나서 조한혜정 님의 책을 계속 읽어봐야겠어요. 꽤 의미있는 독서가 될거 같아요~~

단발머리 2024-12-18 19:20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은하수님! 전후 일본의 세계와는 많이 다르죠. 마리아 미즈 같은 경우도 당시 대부분의 학교가 ‘소년들‘을 위한 것이었고, 마리아의 오빠와 사촌들이 그 혜택을 받았던 거 같아요. 마리아 미즈는 거의 첫번재 경우, 교육 받은 첫번째 여성의 사례였던 거 같아요.
조한혜정님 책도 저도 여러권 찜해 놓았는데, 시작을 못하고 있네요. 은하수님 댓글 보고 다시 생각났어요.
겨울 양식용으로 찾아봐야겠어요^^

독서괭 2024-12-18 16: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다락방님의 글에 이어 단발님의 글까지 읽으니 이 책이 아주 궁금해졌습니다. 얻을 것이 많은 독서일 것 같아요!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배움에는 나이제한이 없으니까! 우리 아직 늦지 않았어요!

단발머리 2024-12-18 19:22   좋아요 1 | URL
쉽게 쭉쭉 읽힙니다. 자신의 삶을 쭈욱 풀어가니깐요. 인생의 길목길목마다 마리아 미즈에게는 ‘행복한 우연‘이 이어집니다. 약간 성공 드라마 느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직 늦지 않은 거 맞지요?ㅋㅋㅋㅋㅋ
독서괭님만 믿고 갑니다!!

공쟝쟝 2024-12-18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는 내일부터 화르르르르를륵!

단발머리 2024-12-18 21:06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