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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1. 영업 비밀과 별천지
영업 비밀을 이렇게 많이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싫어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이런 신세계를 처음 알게 되어 무척 신기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할리우드의 이야기 공식은 (캐릭터 + 욕망) / 방해물 = 이야기 (37쪽)
인데, 이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세상의 갖은 방해 = 생고생(하는 이야기)(40쪽)
로 구체화될 수 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현대인의 기본적 소양이라 할 수 있는 무기력의 양대 산맥은 현대 연애와 암 선고인데, 내 뜻과 무관하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질병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연인을 견디는 것이 현대소설의 본질이라는 것(53쪽),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이야기 작법에서는 예상치 못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지점이 있는데, 이것을 플롯 포인트Plot Point라고 부르며, 대개의 이야기에는 두 개의 큰 플롯 포인트가 있다(91쪽),는 것 역시 금시초문이다.
전통적인 이야기 작법에서 플롯은 3막Act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플롯은 ‘막-시퀀스-장면-비트-액션’의 순서로 구성되며, 플롯의 이런 체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건 액션, 즉 행동이라고 한단다. 역시나 처음 듣는 이야기다. (101쪽)
소설은 물론이요, 영화에서도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에만 집중하는 나로서는 이 모든 정보의 세계는 별천지요, 신세계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는, 쓰고 고치고, 또 쓰는 소설가들은, 참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2. 많이 쓰기만 하면 잘 쓰는 소설가
훌륭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남들보다 많이 말하면 된다. 십 년 이상 소설을 써보면 알겠지만, 소설을 잘 쓴다고 말할 대의 ‘잘’도 그런 뜻의 부사다. 훌륭하게 쓰지 않아도 잘 쓰는 거다. 많이 쓰기만 하면, 잘 쓰는 소설가가 된다. (187-8쪽)
많이 쓰기만 하면, 잘 쓰는 소설가라고 한다면, 무조건 다작의 작가가 최고의 작가이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는 한국 대표는 조정래 선생이고, 미국 대표는 스티븐 킹. 비슷한 이야기의 변주여도 상관없다. 어차피 인간사, 내용이 피차 비슷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질 보다는 양. 양이 최고다. 김연수는 말한다.
난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를 발표했을 때, 읽어보지도 않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일단 두꺼우니까. 오랜 팬에게는 질보다는 양이다. 질은 지난 삼십 년 동안 잘 느껴왔으니 이제는 양, 오직 긴 글, 다음 작품이 나올 때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긴 글만이 필요하다. (38쪽)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모든 독자의 마음이다. 두꺼운 책, 오랫동안 읽을 수 있는 긴 글을 써 주는 작가가, 좋다.
3. 새로 쓸 수 있는 건 오직 문장뿐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내용을 쓰는 사람일까, 문장을 쓰는 사람일까? 물론 정답은 내용과 문장을 동시에 쓰는 사람이다, 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번 소설을 쓴 입장에서 보자면, 소설가는 문장 ‘만’을 쓰는 사람에 가깝다. 소설을 쓰겠다면, 돈을 아껴서라도 세계문학전집을 한 권씩 구입해서 집에 비치하기를. 책꽂이에 일렬로 꽂힌 세계문학전집의 교훈이란 내가 새롭게 쓸 내용은 하나도 없다는 자명한 진실.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수없이 많은 책을 썼다. 거기에 무슨 새로운 내용을 더 보탤 수 있을까? 새로 쓸 수 있는 건 오직 문장뿐이다. (191쪽)
책꽂이에 일렬로 꽂힌 세계문학전집을 보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작가 지망생에게 김연수는 말한다. 새로 쓸 수 있는 건 오직 문장뿐이다. 새로운 이야기보다는 새로운 문장이다. 소설가로서 자신의 목표는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것뿐이라고 말했던 김영하도 생각난다.
새로운 건 오직 문장뿐이고, 완전한 새 우주로서의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 역시 문체, 오직 문장뿐이다.
4.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 구상하지 말자. 플롯을 짜지 말자. 캐릭터를 만들지 말자.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컴퓨터가 있다면 거기에 쓰고, 노트라면 노트에 쓰고, 냅킨밖에 없다면 냅킨에다 쓰고, 흙바닥뿐이라면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집어서 흙바닥에 쓰고, 우주공간 속을 유영하고 있다면, 머릿속에다 문장을 쓰자. (199쪽)
내 경험으로 보자면, 하루에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 세 시간동안 최대한 느리게, 거의 쓰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느리게 쓴다. ....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글쓰기지만, 그럼에도 하루 세 시간을 소설에 할애하면 얼마간 글을 쓰게 된다. 5매 정도라면 최고다. 하지만 한 줄도 괜찮고, 아예 쓴 게 하나도 없어도 상관없다. 세 시간이 지나면 읽고 쓰던 걸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외의 시간에는 소설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게 좋겠다. ... 글을 얼마큼 많이 써느냐가 아니라 소설을 생각하며 세 시간을 보냈느냐 아니냐로 글쓰기를 판단하니 결과적으로 나는 매일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됐다. 그렇게 매일 소설을 쓰게 되면 가장 느리게 쓸 때, 가장 많은 글을, 그것도 가장 문학적으로 쓸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232-3쪽)
소설가 지망생에게 필요한 정보라면 책 앞부분의 플롯 짜기, 캐릭터 만들기, 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적 조언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일단 한 문장을 쓴다. 쓰고 또 쓴다. 시간을 정해서 쓴다. 하루에 3시간을 투자한다. 그 시간에는 오직 소설만 생각한다. 5매 정도면 최고다. 최대한 느리게 쓴다.
소설가가 되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쉬운 방법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운 문장을 쓰는 사람은, 하루 3시간씩 소설을 생각하는 사람은, 소설을 쓰는 사람, 소설가가 된다.
김연수 자신이 어떻게 그 시간들을 견뎌왔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다른 책 [청춘의 문장들+]에서 읽을 수 있다.
소설을 쓴다기보다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벌었어요. 하루 종일 그렇게 일해도 석 달이면 돈이 다 떨어져요.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2007년쯤 책을 내면 1만 부가 팔리는 작가가 될 수 있었어요.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따지면 7년만이죠. ... 정말 이젠 괜찮겠구나, 라고 생각한 건 2009년이 되어서였어요. 그러니까 한 10년 걸리더군요. 그 10년 동안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소설이 아닌 다른 글부터 써야만 했던 시절이에요. 진입 장벽이 엄청나게 높은 거죠. 이 나라에서 전업작가가 되는 일은 대통령 되는 일만큼이나 어려워요. 10년 단위로 두 명만 대통령이 되는데, 그런 식인 거죠. (94쪽)
소설을 쓰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것보다, 생활을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든 건, 소설 쓰는 바로 일이니, 소설 쓰기는 이렇게 어렵고도, 이렇게나 쉽다.
5.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
나는 어릴 때부터 ‘제일’이란 단어에 집착했다. 웬만큼 친해진 친구에게, 후배에게는 항상 물어봤다. “너의 제일 친한 친구는 누구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뭐야?”,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이 정도는 알아줘야 내가 그 친구/후배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의 책,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산문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 난 이런 거에 집착한다.
이제 나온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이다.
혹시나 이뤄질지도 모를 어떤 삶이 내 인생의 목적지가 아니라 어쩌면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 현실이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일지도 모른다고. (251쪽)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 그런 현실이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될 것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나는 아직 불혹에 닿은 나이가 아니다. 나는 아직 젊고, 나는 아직 철들지 않았으며, 나는 아직도 ‘할 수 있다’와 ‘하면 된다’의 주문에 솔깃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
내게 남겨진 시간 속에서, 내가 원하는 그것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이 곳이 나의 마지막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모든 문학의 출발점이 그러한 것처럼 여기에서의 삶도 그럴 수 있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여야 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아서,가 아니고, 어쩔 수 없어서,이다. 선택한 것,이 아니고, 선택당해서,이다.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핵심이다.(262쪽)
그것을 아는 것이 소설가의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지금, 바로 나의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