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최고의 책이 아니라 '내가 읽은' 21세기 최고의 책이니깐, 가능하면 여러 번 읽고 여러 번 글을 썼던 책을 위주로 골랐다.
내게는 '작품'보다 '작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시녀 이야기』도 좋지만 나는 『그레이스』도 좋고. 『증언들』 좋아하지만, 한 번 더 읽겠다 하면 미친 아담 3부작을 읽을 것 같다. 그렇게 골라봤다.
1. 미친 아담 3부작
애트우드 작가님, 제가 전작 읽기 하려 했는데, 아직도 3-4권 남았어요. 노벨문학상 타셔야 하는데, 한강 작가님도 타셔야 해서, 올해는 어쩔 수 없었어요. 마침 저희도 '비상 계엄'이라 딱이었구요.
오래오래 사세요. 꼭! 노벨문학상 받으셔야 합니다.
2. 나의 눈부신 친구
이 책 읽어본 사람들 다 그렇게 말하지만, 나 역시 얇지 않은 이 책을 읽으며 팔뚝 운동을 반복하고 낮과 밤을, 그리고 다음 밤을 하얗게 지새웠던 기억이 난다. 한글로, 영어로 한 번씩 읽었는데, 진지하게.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던 책이다. 강렬 스포. 나의 눈부신 친구는 릴라가 아니다. 니노 개새도 아니고. 그럼 누굴까? 나의 눈부신 친구는?
3. Lucy by the sea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책 중에 가장 아름답다. 화해와 화합의 메시지를 기꺼이 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다는 걸 이 책은 보여준다. 예상대로 되지 않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가끔 그 소중한 무엇이 내 무릎 위에 날아올 때가 있다는 것. 나비처럼. 나비처럼 나폴나폴.
4. The love hypothesis
나를 로맨스 소설로 이끌었던 최고의 문제작.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었는데, 돌아갈 수 없어서 길을 잃었고. 헤매는 길에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도 만났다. 그중에, 내가 읽어왔던 로맨스 소설 중에 딱 한 권을 고르라 하면 나는 이 책을 고를 것 같다. 21세기 최고의 로맨스.
5. 깜박깜박 도깨비
정희진쌤이 10권 중에 글씨 없는 그림책(『노란 우산』) 고르신 것 보고 영감 받아 동화책 중에서 골라봤다. 깜박깜박 잊어버리면서 나를 위해 애쓰는 그 착한 도깨비. 내게는 그런 도깨비가 있다. 감사할 일이다.
6.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과학책은 카를로 로벨리 책 중에서 고르기는 할 건데 뭘로 할지 몰라 한참 고민하다가 최근 작품으로 골랐다. 내가 잘 모르겠는 양자 중첩과 상호작용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한데, 책이 작고 가벼워 도전해 볼 만한다.
속성은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대상 사이에 놓인 다리인 것입니다. 대상은 맥락 속에서만, 즉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다리와 다리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이 세계는 거울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비쳐야만 존재하는 관점들의 게임인 것입니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111쪽)
대상은 맥락 속에서만, 즉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내 존재의 의미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조건과 상황에 근거한다. 나와 관계 맺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속성이 발현된다. 이 놀라운 철학적 사유의 과학책이라니.
7. 사피엔스
베셀계의 베셀. 압도적 1위. 그냥 1위 아니고 전 세계 1위. 금메달. 넘사벽. 김연아급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유발 하라리의 한계가 분명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욕 한 번 하고 내다 버리기엔 조금 아깝다. 배울 점이 있다. 있긴 있다. 한글로 한 번, 영어로 한 번, 그리고 그래픽으로 1번 읽었는데 시간 나고 심심하면 한 번 더 읽을 용의 있다. 나 너 좋아하냐? (이민호 톤으로)
8.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제2의 성』, 『가부장제의 창조』, 『여성과 광기』는 모두 2000년 이전에 나온 책들이라 울상이었는데, 에이드리언 리치의 이 책이 있어서 반가웠다. 전사이자 시인인 에이드리언 리치. 이 세상 모든 페미니스트들의 우상. 나의 우상.
가정에 매이지 않는 여성, 이성애적 짝짓기와 출산의 법칙을 거스른 여성은 남성 헤게모니에 커다란 위협을 가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도 이런 여성들은 선교사로, 수녀로, 교사로, 간호사로, 결혼하지 않은 이모나 고모로, 사회를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라는 기대를 받았고, 중산층이면 노동력을 팔지 말고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으며, 여성의 처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온화하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이들은 아이들에게 매시간 매인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명상하고 관찰하고 글을 쓸 시간이 있었고, 일반적인 여성들의 경험에 관한 강력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샬럿 브론테(첫 임신 중 사망), 마거릿 풀러(주요 업적은 아이를 낳기 전에 이루어졌다), 조지 엘리엇, 에밀리 브론테, 에밀리 디킨슨, 크리스티나 로제티,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아이 없는’ 여성들의 인정받지 못한 연구와 학문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모두 여성으로서 정신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215쪽)
9.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페미니즘의 도전』과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그리고 이 책 중에 고민했지만, 이 책으로 정했다. 책 읽다고 내게 신호 보내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책. 고통에 대한 사유 뿐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실천편>이 들어있어서 힘들어 하는 어떤 사람에게든 전해주고 싶은 책이다.
10. 상황과 이야기
고닉을 읽고 알았다. 이제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 자신을 잃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 자신을 잃을 일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돌연 깨달았다. 내게는 나를 위해 싸워줄 서술자가 있었다. 이 서술자는 자신이 곧 어머니처럼 되었기에 그 곁을 떠나지 못한 여자, 바로 나였다. "또 혼자"라는 상황에 겁먹지 않는 서술자. 생각해보면, 그는 도시를 걸어 다니는 사람, 혹은 이혼한 중년의 페미니스트, 혹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작가인 나에게도 크게 휘둘리지 않았다. 이 서술자는 그저 견고하고 제한된 자아로, 중심을 잘 잡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내가 해낸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페르소나를 창조해낸 것이다. (『상황과 이야기』, 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