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혼자 출발했다는건데 경유지를 동작으로 잡은 게 패착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환승이 안 되는데, 그럼 어째야 하냐고, 나는 국회의사당으로 가야 한다고. 걸어가면 본인 걸음으로 40분, 보통 걸음으로 1시간 정도 거리라는 경찰관님 말을 믿고 밖으로 나와 패딩 행렬을 따라 걷기 시작했는데. 바람은 불어오고 지나가는 버스는 사람이 꽉 차서 당연히 무정차. 택시를... 택시를 타도 되나요?

가다보니 사람들이 쭉 늘어서서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그 옆에 많이 보던 초록색 자전거. 아, 저거 서울시 유망사업 따릉이구나. 싸이클 타던 나이지만 그건 20년전 이야기고. 어디서 반납할지 모르는데 끌고 갈 수도 없는 일. 사람들은 따릉이 타고 가기로. 나는 그냥 가기로.










그렇게 걸어가는데 떡 하니 왼쪽에 웬 강이… 이것이 진정 서울의 자랑, 한강이란 말입니까. 제가 왜, 여기 지금 여기에 와 있는거죠? 저는 국회의사당으로 가고 있다고요. 저는 그냥 탄핵 집회에 가고 싶어요. 맞나요? 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에요? ... 그렇게 계속되는 걷기와 뛰기(초등 계주 대표). 부러워하던 한강변 조깅을 원치 않게 실행하게 되는 그런 순간. 제일 큰 걱정은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 제가 제대로 가고 있나요? 이 길이 맞나요? 그리고 갑자기, 느닷없이 나타나는 검은색 패딩 행렬. 맞구나. 내가 제대로 찾았어. 그러니까, 나는 동작에서 출발해서 흑석, 노들, 노량진을 거쳐 드디어 샛강역에 도착하고. 저기 멀리 보이는 저 동그란 반원이 국회의사당. 맞구나, 제대로 찾았어.



쉽사리 통과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란수괴를 이리도 옹호할줄은 몰랐던 일이라서 그 날 밤에는 언짢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앞으로 어떡해?' 질문이 머리 속을 빙빙 돌았는데, 아침이 되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부결되었다고 해서, 포기할 민족이 아니다. 이 백의 민족은, 철의 민족은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 '상록수' 부르는 뭉쿨한 결기 없이도 이길 수 있다. 결국은 이기게 될 것이다. 그럴 것이라면, 나는 내 일상을, 내 하루를 잘 살아나야겠다,라는 다짐을, 작심3일의 명수인 내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의 그 생각. 그래, 나쁜 놈이 득세하는 세상. 더 나빠질 수 있겠지. 그래도 나는 열심히, 내가 해야 할 일을 성실히 해내야겠구나. 오늘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

바꾼다고 꺼내놓은 작은아이 침대 매트를 세탁기에 넣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반찬통을 꺼내고, 깎두기와 총각무를 작은 통에 옮겨 담고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큰 통을 치웠다. 박스채 쌓여있는 재활용을 개봉해 물건들을 제자리에 넣고, 지난밤 만든 제육볶음이 조금 짠 것 같아 양파를 새로 하나 더 썰었다.




책장에서 꺼내 스타벅스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이달의 여성주의책을 김치냉장고 위로 가져다 놓고, 그대로 쌓아두었던 <이달의 구매도서>를 책탑으로 만들고 그 옆에 친구들의 책선물을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다 읽은 책의 인덱스를 정리하고, 뭐에 대해 쓰려고 했는지 간단하게 메모해 두었다.

내 일상을 찾고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내면서 그러면서 이 싸움의 끝을 보리라, 꼭 보고야 말리라, 다시 또 결심했다.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고, 아이돌 응원봉을 흔들며 탄핵을 외치고, 지하철역에서부터 ‘윤석열을 / 탄핵하라!’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의 나라에 살고 있는 나여서 행복하다. 거리에서, 나의 플레이리스트 1번은 여전히 '상록수'지만, 로제의 <아파트>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나의 구호는...

Hold on, hold on!

I'm on my way

Yeah yeah yeah yeah yeah

I'm on my way~~

끝내~~ 이 기 리 라!!!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건수하 2024-12-11 09: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나 동작에서부터 걸어가셨다고요..
열정의 단발머리님. 저는 9호선 피해서 5호선으로 갔었답니다. 지금은 그 사람 많던 9호선 타고 국회의사당 옆을 지나갈 예정..

이번 주말에는 여의도가 기쁨으로 가득 차기를…

단발머리 2024-12-11 10:36   좋아요 2 | URL
그러니깐요. 왜 저는 환승역을 동작으로 잡아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의나루에서부터 걸어갔으면 됐을텐데요. 덕분에 한강변을 걷는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다음에 한 번 더 걷고 싶더라고요.

이번 주말에는 여의도가 기쁨으로 가득차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을거라 믿고요!!
아.... 우리의 이 간절한 바람.... 꼭 이루어지기를!!

다락방 2024-12-11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번에 베트남에 갈 때 나라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두고 오래 안읽었던 책, 한홍구의 [4.19] 혁명을 들고 갔거든요.
그 때도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걸 놓기 싫어서 온갖 나쁜짓을 했고, 그러면 안되는거라고 시민들이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 길로 뛰쳐나왔더라고요.
주기적으로 나쁜 놈들이 힘을 쥐고 멍청한 판단을 하지만, 그런데 그 때마다 이렇게 그걸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쁜놈들 때문에 분노했다가, 한마음이 되어 행진하고 노래 부르는 사람들 때문에 또 고맙고 감사하고 벅차고 그래요.
제가 이번엔 못나갔지만, 시위라는게 그렇더라고요. 그 현장에 있으면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외치면서, 그런데 이 사람들과 한마음이라니, 가능해질 것 같은 그런 희망 같은거가 생기더라고요.

나쁜 권력자가 일상을 망친 것 같아 너무 화가 났어요. 화가 났는데, 그렇다고 내 일상이 망쳐지면 그건 그의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일상을 살아나갑시다, 단발머리 님.

그런데, 파운데이션.. .사신거에요?????

단발머리 2024-12-11 10:39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4.19 때도 그랬지요. 5.18도, 6월 항쟁도 그렇구요. 나쁜 놈들은 꾸준히 나쁜 짓을 하는데, 그게 자신들의 권력을 위한거고요. 그걸 어떻게 막아서야 하는지. 희망이라면, 이제 시위 현장이 더 이상 ‘피의 거리‘가 아니라서 너무나도 감사하고 안심이 되요. 물론 그게 가능한 것도 화요일 밤에 국회로 달려간 분들 덕분이겠죠.
오늘의 평안과 일상을 그 분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한 우리의 일상을 지켜가고 싶어요.
단단하게(다락방님 모토), 명랑하게(내 모토) 지켜나갈거예요!

파운데이션은.... 올 겨울에 시간이 나는 어떤 사람을 위해 구입했습니다. 큰 맘 먹고요. 제가 그 사람은 아니지만, 읽는 사람은 아마도 제가 될 것 같은 예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 책이라 엄청 마음이 동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12-11 12:13   좋아요 1 | URL
파운데이션 저도 그게 젤 눈에 띄었는데...
파운데이션은 다른 분을 위한 책이었군요.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12-11 12:39   좋아요 0 | URL
그 다른 분은 지금 많이 바쁘신 거 같아요. 시간은 많은데... 왜... 쩜쩜...
제가 읽을 겁니다. 확실합니다!!

blueyonder 2024-12-11 1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 주 토요일에 동작에서 엄청난 인파 속에서 전철 갈아타려던 1인이었습니다. 결국 타긴 했지만 여의도역 무정차라서 걸어서 한강을 건넜습니다. ^^
파운데이션, 저도 꼭 읽어보고 싶은 시리즈입니다. 여러가지로 응원 드립니다~!!

단발머리 2024-12-11 11:31   좋아요 2 | URL
그렇다면, blueyonder님과 우연히 스쳐 ㅋㅋㅋㅋㅋㅋㅋㅋ 지나치진 못했겠네요. 저보다 일찍 가셨군요.
여러 가지 응원 속속들이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 응원합니다. 우리 꼭, 우리의 일상을 찾아오자고요!!

햇살과함께 2024-12-11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녁 일정이 있어서 일찍 갔다 일찍 나와서 다행히 지하철 무정차 풀릴 때 나왔는데,
(무정차면 한강변으로 뛸 생각으로^^)
역시 여의도는 섬이라 강바람이...춥더라고요...
저녁까지 계신 분들은 많이 추우셨을 듯해요...

단발머리 2024-12-11 12:41   좋아요 0 | URL
저도 보통은 일찍 갔다가 일찍 나오는데 그날은 일정이 꼬여서 늦게 출발했더니 이런 놀라운 일들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여의도쪽 강바람이 예사롭지 않더라구요. 늦게까지 계셨던 분들 많이 추우셨을 거에요. 저도 끝까지 자리에 있지는 못했어요.
이번주 토요일에 끝나야할텐데요. 그러리라 믿고 있습니다만... 만약 아니면, Hold on! 들어갑니다!

감은빛 2024-12-11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산책이었겠네요. 추운 날씨에 고생하셨습니다. 초등 계주 대표였다고 말씀하시기엔 세월이...... 아, 아닙니다. 여전히 달리기를 좋아하고 잘 하신다는 말씀이시죠? ㅎㅎㅎㅎ

단발머리 2024-12-11 14:55   좋아요 0 | URL
저는 산책이 아니라 행진이었다고 고백하고 싶지만 ㅋㅋㅋㅋㅋㅋㅋ 사실 방황의 길이었구요.
잘 도착해서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초등 계주 대표였다고 굳이 밝히는 건 제가 지금도 잘 뛸 수 있다는 ㅋㅋㅋㅋㅋㅋㅋ 뛰지 않는 삶이지만 뛰기만 하면 잘 뛸 것이라는ㅋㅋㅋㅋㅋㅋ죄송합니다. 벌써 수십년전 이야기네요.

2024-12-11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4-12-11 14:58   좋아요 0 | URL
❤️🧡💛💚🩵💙💜🩷🩶🤎🖤

수이 2024-12-11 15:0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

단발머리 2024-12-11 15:07   좋아요 0 | URL
💗

공쟝쟝 2024-12-11 17: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래 따라 불렀어요. 암온마웨-끝내이기리라.ㅋㅋㅋㅋ 이게 모예욬ㅋㅋㅋ
단발님의 도강 작전 ㅋㅋㅋㅋ
저는 시위한정 발달한 촉(?)으로 가장 효율적인 동선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ㅋㅋㅋ 국회 거의 앞까지 갔다가 눌리지 않고 빠져나오기까지 했습니다만 ㅋㅋㅋ ......응원봉... 응원봉은 챙기지 못하였나이다..... 하, 그 날은 누군가의 팬이고 싶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

단발머리 2024-12-13 15:28   좋아요 1 | URL
저의 도강은 참으로 옳았고 ㅋㅋㅋㅋㅋㅋㅋ 불안했으나 재미있었고.
무서웠으나 즐거웠습니다.
시위한정 발달한 촉ㅋㅋㅋㅋ매우 부럽구요. 우리는 왜 응원봉 하나도 없어요? 왜요, 왜?
저도 보라색 갖고 싶단 말이에요!!!!

나와같다면 2024-12-11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old on, hold on!
I‘m on my way
Yeah yeah yeah yeah yeah
I‘m on my way~~
끝내~~ 이 기리라!!!

아.. 뭔가 웃기면서도 뭉클합니다

우리는 끝내 이길겁니다!

단발머리 2024-12-13 15:2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우리 반드시, 끝내 이길것입니다.
이기고 또 이기고.
이기고 결국 이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