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했을 때, 내가 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베일리. 다른 베일리도 있다. 요즘 뭐, 베일리 풍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단 조나단 베일리가 있고, P. 베일리(P. 베일리, 나만의 그대여....)가 있고, 그리고 베일리 한 명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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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느끼기에는 작년보다 훨씬 수월하다. 체력이 좋아졌다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내 몸이 이 생활에 적응한 것처럼 느껴진다. 정신적으로는 작년보다 고되다고 할 수 있는데, 작년에 경험하지 못한 빡침의 순간들이 여러 번 찾아와서, 이제 내가 진짜 직장인이 되는건가, 싶기도 하다. 인생은 원래 고행이고, 고된 것이 기본값이라고 되뇌이기엔 퇴근 시간이 너무 빨라서...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안 된다고 본다.
작년에는 짬짬히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지는 못해도 알라딘 눈팅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엔 그럴 시간이 없다. 작년이 천국이었구나,를 올해 깨달았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서도 쓰고 싶지만, 또 그걸 쓸 시간이 없고.
나는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아니라는 걸 발견했다는 건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발견했다는데 나는 또 ‘굳이’ 작은 ‘의미’를 둔다. 일찍 퇴근해서 작년처럼 바닥에 키스하지 않지만, 식탁에 앉으면 책을 펴기보다는 유튜브에 접속을 하고, 그리고 포털에 들어가 뉴스도 읽고,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허송세월.
그 와중에 독서대에 올려둔 책은 이 책이다.
투비에 자주 가지는 않는데, 투비 갔을 때 읽은 장강명의 글이 눈에 들어와 도서관에서 대출해 왔다. 앞에 조금 읽어보니 사야할 책이어서 사야지, 사야지, 어서 사야지, 하고 있다. 이 책을 사야지, 라고 결심한 지점은 여기다.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주의 기원과 인간 진화의 역사를 살펴봐야한다는 바로 거기. 그 문단.
나는 인간의 죽음과 인생의 의미를 다룬 책들 중 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 책들이 가는 길을 쪼금 안다. 죽음 현상을 탐구하고 이해해 보려 하다가, 노력을 조금 하다가, 결론은 하나로 모아진다. 우리,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죽는다. 당신도 죽는다. 죽음을 받아들여라.
인간의 삶이 아무리 무의미할지라도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 그 무의미를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부조리의 영웅이 되는 길이요, 우리의 부조리한 인간 조건에 대한 진정한 반항인이 되는 길이라고 카뮈는 역설한다.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46쪽)
죽음과 타협하라.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무섭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용기, 연민, 그리고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불어넣음으로써 삶을 숭고하게 만든다. 의미와 가치, 사회적 관계, 영성, 개인적 성취, 자연과 동일시, 순간적인 초월 경험을 자기 나름대로 잘 조합함으로써 영원히 지속될 의미를 찾으라. 이런 방도를 제공하는 문화적 세계관을 장려하고 불확실성 및 자기와 다른 신념을 품은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 (<슬픈 불멸주의자>, 345쪽)
나는 과학책, 특히 빅히스토리를 다룬 책들이 가는 길을 쪼금 안다. 우주의 시작과 생명체의 출현, 지구의 변화와 그와 함께 이어지는 지난한 진화의 과정. 그리고 그 결과물 혹은 총체로서의 인간. 당신은 그 모든 돌연변이의 운좋은 결과물이다. 우리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은 이미 죽는 중이고, 결국 우주의 먼지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짧은 시간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 만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창출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유산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미 우주의 타임라인을 조망한 우리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목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의 입자들이 모여서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단명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연결 관계를 확립하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엔드 오브 타임>, 455쪽)
나는 이러저러한 결론이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게 맞는 답인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매일 묻는다. 명랑하고 긍정적인 내가 묻는다. 내 인생의 조건과 환경에서 대부분의 경우 낙관적이었고, 앞으로도 낙관적일게 분명한, 내가 묻는다. 내 삶이 행복해서가 아니라, 행복한 삶 너머가 궁금해서 묻는다. 그 답으로 내 삶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이 오늘, 바로 지금 나의 삶을 지속할 만한 이유가 되는가. 합당한 이유가 되는가. 그 이유가 내게, 충분한가.
직딩, 내 표현으로 하자면, 피라미드 조직의 제일 아랫칸에 위치한 나는, 이런 고민을 매일 안고 사는 나는, 저 책을 독서대에 올려 놓고. 올려 놓고는 읽지는 않는다. (어제 반납해서 이젠 읽을 수도 없다.) 아렌트 전기와 아렌트 책을 미뤄놓고 있고, 아직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의 4번째 책도 마치지 못 했다. 그래서 맨날 노트북과 놀다가 지친 내가 지난 주말에 읽은 책은, 바로 이 책. <Love on the Brain>.
표지가 마음에 안 드는 이 책. 다행이다. 남자주인공은 마음에 든다. 이 책을 하나의 도구로 삼아 나와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 그녀에게 내가 이 책을 샀음을, 그리고 핸드폰으로 쭉쭉 넘기며 대충이지만 다 읽었음을, 나는 말해줘야 하고. 그리고 다시 읽어야 한다.
그저께 난데없이 제정신이 조금 돌아와서 읽은 책은 이 책이다. 엘렌 식수, 내 스타일인가. 내 스타일 아닌가. 사람 이름 항상 헷갈리는 나는 엘렌 식수랑 이리가레 맨날 헷갈리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 엘렌 식수인지 이리가레인지도 모르면서 읽는다. 5월 여성주의책 같이 읽기 대상도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찾다가 발견해서 읽는다. 어제는 이런 문단을 만났다.
읽기는 또 몰래 하는 은밀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걸 인정하지 않지요. 그건 당황스럽습니다. 읽기는 우리 주장만큼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서재 열쇠를 훔쳐야 합니다. 읽기는 도발이고 반란입니다. 우리는 그냥 단순한 문고본을 펼치는 척하면서 책의 문을 열고는, 백주에 탈출하는 겁니다! 우리는 더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읽기는 그런 것입니다. 그 방을 떠나지 않았다면, 담을 넘지 않았다면, 읽고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 있는 체하고 있다면, 가족들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읽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먹고 있습니다. 읽기는 몰래 먹기입니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44쪽)
그러니깐 지난 주말에 로맨스를 두 권 읽었는데, <Love on the Brain>은 이북이라 핸드폰을 휙휙 넘겨가며 읽는라 다들 내가 핸드폰 하는 줄 알았는데, 이 책은. 아, 이 책은 책이라, 숨겨가며 읽어야했고. 우리집 사람들은 책은 안 읽어도 내가 읽는 책에는 다들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종족들이라 조심해야 했고. 특히 눈이 좋고 영어를 빨리 읽어제끼는 큰애가 제일 위험하며. 나는, 엘렌 식수의 말처럼, 그렇게 ‘가족들의 시선을 속여가며’ 이 책을 읽었으니, 그 책은 바로 이 책. 제목부터 부끄러운 이 책이며. (내 책은 다른 표지인데 알라딘에는 없는 듯하다. 내 책의 표지는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다.)
이 책의 저자가 바로 베일리, 테사 베일리인 것이다. 세 명의 베일리 중 굳이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잠깐 고민에 빠질 것이고,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 내게 기쁨을 주는 사람, 그리고 나로 하여금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 중에. 나는 발칙하게도, 내게 기쁨을 주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니, 내가 선택한 베일리는.
그 베일리다. 베일리, 그 베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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