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과 논픽션 중 어느 것이 더 현실을 반영하는가. 리얼한 두 개의 상황 중, 어느 상황에 더 몰입하는가. 누구의 불행이 더 큰가. 새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는 한숨을 고르며 마음의 준비를 한다. 소설을 읽는 일이, 픽션을 읽는 일이 내게는 훨씬 더 큰 각오를 필요로 한다.

 

 

아침에는 <Lessons in chemistry>를 읽었다. 움베르트 에코는 아니지만 에코의 마음을 이해하니까. (“제 머릿속에는 아직도 낮에 소설을 읽는 것은 지나치게 쾌락을 좇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있지 않나 생각한답니다.” <작가란 무엇인가 1>, 45) 아침에 소설을 읽는 일은 너무 큰 쾌락이니까. 아침에 소설을 읽는 건 너무 호사스러운 일이니까. 그래서 나도 아침에는 소설을 읽지 않는데, 그래도 소설을 읽고 싶을 때는 영어로 읽는다. 영어=공부라는 공식하에, 쾌락의 일부를 내어놓고 다른 언어가 선사하는 난해함을 껴안는다. 그렇게 어제 아침에는 이 책을 읽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시작한 읽기. 당차고 야무진 주인공 앞에 시련이 닥쳐온다. , 아니. 잠깐만요. 아니, 벌써 이렇게 큰 고난이 닥쳐오면 이 주인공은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 ? 아니 잠깐만요. 고난에 고난, 난관에 난관을 거듭하던 주인공에게 찾아온 인생 최대의 위기. 그녀가 아이를 낳는다. 연신 울어대는 아기, 어찌할 줄 모르는 초보엄마 앞에 구원자가 나타난다. 길 건너편에 사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죄책감에 찌든 초보엄마에게 과거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해 준다.

 


"Years ago, when I was a new mother, Mr. Sloane was away on business and a horrible man broke into the house and said if I didn't give him all our money, he'd take the baby. I hadn't slept or showered in four days, hadn't combed my hair for at least a week, hadn't sat down in I don't know how long. So I said, 'You want the baby? Here." She shifted Madeline to the other arm. "Never seen a grown man run so fast." (145p)

 


엄마에게서 전해 들은 외할머니의 이야기와 똑같다. 첫딸을 낳은 후, 빽빽 울어대는 아이를 보며 어찌할 줄 몰랐다는 20대 초반의 외할머니. 저 아이가 콱 죽어버렸으면 했다는 외할머니. 그 후로 딸 셋과 아들 셋을 더 낳은 외할머니, 젊은 시절의 외할머니.

 

 


친정과 시댁, 그에 더해 친구들까지.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우리집에 놀러 왔다가(큰애를 데리고 외출하기 어려운 나를 위한 가정방문) 큰애와 내가 경쟁적으로 친구에게 말을 걸려고 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웃는다. 나는 다급했고, 큰애는 절실했다. 친정과 시댁에서 그토록 전폭적으로 양육 지원을 해주셨는데도 그랬다. 자주 웃었고 큰 소리로 노래했지만,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시간을 떠올릴 때의 암담함은 여전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미숙한 엄마였다.

 

나처럼 미숙한 엄마가 여기 나온다. 나처럼 미숙한데, 도와줄 사람이 없다. 내 몸도 천근만근인데, 내 몸 건사하기도 바쁜데, 쉬지 않고 울어대는 아이가 옆에 있다. 이 아이는 도대체 누구이며, 언제,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왔는가. , 내 옆에 있는가. 주인공의 고단함이 너무나도 가까워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펼친 책은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만만치 않게 극적이고 그리고 암담한 상황이 밀려온다. 엄마, 엄마란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 고통을 엄마에게, 엄마의 이름을 가진 여성에게, 엄마라 불리는 여성에게 전가하는가.

 


일하는 엄마라서 햄이나 소시지를 너무 자주 먹였다, 일하는 엄마라서 영상을 너무 많이 보여줘 전자파에 과도하게 노출시켰다. 일하는 엄마라 시간이 없어 아이를 매일같이 재촉하며 압박을 줬다. 일하는 엄마라서 아이의 정서를 세심하게 보살피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줬다. 일하는 엄마라서 아이의 이상징후를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 임신하고도 정신 못 차리고 체중 증가에 신경 쓰며 식단을 관리했다. 대학 때부터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염색체 이상 소인을 물려줬다 등등 아픈 아이를 낳고 기른 엄마의 잘못은 끝이 없었다. 가임여성이 된2차 성징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삶을조각조각 분해해서 살펴봐야 할 판이다. 원인을 모르니 절망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누가 재난을 초래했는지 알 수 없으니 복수할 대상도 없다. 결국 다시 엄마에게로, 나에게로 돌아온다. (39)

 
















<숭배와 혐오>를 읽었을 때였다. 책 속 문장들이 거부감 없이 이해될 때, 혼란스러웠다. 가족 간에는 허물을 보기 쉽고, ‘지극히예의를 갖추는 일이 어렵다. 이런저런 갈등과 다툼이 생길 때,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이다. 이게 누구의 잘못, 또는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그게 나 때문’. ‘엄마 때문이라는 말이 자주 들렸는데, 이건 나의 개인적인 부주의(식구들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 편,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하지 않는엄마, 사회적인 일을 하지 않는엄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다른 책을 읽던 중에, 엄마가 직업을 갖고 있는 경우에도, 엄마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가족 구성원들의 원망의 대상은 같은 성별, 같은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였다.

 


어머니는 언제나 실패했다. 내 주장의 핵심은 그러한 실패가 재앙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며 실패 역시 어머니에게 맡겨진 임무의 일부라는 점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세상에 들어서는 입구이기에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사회적 퇴보를 막는 신성한 임무를 짊어지게 된다. 현대가족에서 이러한 경향은 사회적으로 진화해 모든 일의 책임을 어머니에게 묻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그 결과 어머니는 세상의 온갖 병폐 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 불가피한 실패 뒤에 찾아오기 마련인 분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죄책감을 갖게 된다. (41)

 


그러니깐 실패의 원인으로 여성, 어머니가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어머니의 임무 중 일부라는 사실이, 우리의 현실이다. 픽션과 논픽션, 모두에서 그렇다. 실패는 엄마가 수행하는 임무의 하나이고, ‘엄마를 탓함으로써 다른 이들은 그 에서 벗어난다. 탈출한다.

 

 


나는 둘째를 낳은 후, 아주 조금 철이 들었는데, 실천하려고 다짐한 일 중 하나가 엄마에게 짜증 내지 않는 거였다. 구체적으로는 엄마에게 큰 소리로 말하지 않기가 내 목표였다. 항상 잘 지켜지는 건 아니고, 안 될 때도 많지만, 내 수준에서는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있다. 엄마에게 짜증 내지 않기. 실패의 원인이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기. 엄마의 잘못이 아닌 일에 엄마를 원망하지 않기. 다정하게 말하기. 전화 자주 하기. 카톡 자주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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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3-30 22: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글 정말 너무 좋습니다.. 엄마 당사자ㅋ… 🥹의 입장에서 읽으니 좀 더 와닿고… 실패의 이유를 나와 가까운 나 아닌 다른 이에게서 찾는 일(미워하고 원망하는 일)은 쉽고 쉬운 일이라 그 첫번째 대상이 엄마가 된다는 말이 뼈 아파요. 그리고… 어쩌면 그게 아주 오랜 가부장 5천년치의 여성에 대한 타자화의 토대이며 우리 일상에서 반복되어 왔다는.. (어머니 숭배와 혐오…).
사실 진짜 문제는 그렇다면 엄마는 누구를 탓하나?… 라는 것일텐데.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속의 이 훌륭한 엄마는 자신을 탓하지 않기로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걸 씁니다. 반가웠어요. <82년생 김지영>은 미치 잖아요. ㅜ..ㅜ 현실의 작가님은 안미치려고 고군분투!!! 어쨌든 나는 다행스럽게도 지금을 살아서 이 여성들의 글을 읽으면서 자칫 그렇기 쉽게(자책) 사회화되느라 힘들었던 저 자신을 생각해보곤 합니다. 다행이라는 생각 뒤에 따라오는 건 고마움. 내 분노가 고마움이 되기까지… 글을 더 읽자. 하아…

단발머리 2024-04-02 08:32   좋아요 1 | URL
이 댓글이 제 글보다 더 좋은데요 ㅋㅋㅋㅋㅋ 전 이 책 읽으면서 참 복잡한 마음이 들었고 그걸 다 쓰지를 못했어요. 백자평도 쓰다가 포기했고요. 좋은 리뷰 쓰고 싶은데 뭐랄까.... 제 경험하고 막 섞이니깐 (그니깐 저의 절망 포인트?) 말로 풀어내지 못하겠더라구요.
자신을 탓하지 않고 용감히 맞선 저자, 신성아님에게 응원과 사랑을 보냅니다. 할일이라는 건 이 책을 사고 또 사는 일일텐데. 아, 읽기 힘든 책인건 또 사실이구요. 그래도 나도 받은 것처럼, 나도 선물해야지~~ 그런 맘입니다.
글을 더 읽자.... 하아.....

공쟝쟝 2024-04-02 09:13   좋아요 1 | URL
어떤 책은 심정적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지적으로가 아니라 심정적으로…. 저는 (지난 몇년 동안)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했는 데, 이거 읽으면서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어요. 저자가 닿은 인식 과정은 공감되었지만… 너무 많은 말이 속에서 우글대다 사라졌지만… 그나마 제가 떠들 수 있는 건 그건 아마 엄마 당사자 단발님 보다 경험이 딱 붙어 있지는 않아서 그럴 거예요….
사랑에는 의혹이 필요합니다…
사랑이기에 의혹이 필요합니다…😭

단발머리 2024-04-02 20:02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쟝님.... 그니깐 전 신상아 작가의 글을 따라 읽으면서 저 자신의 경험, 시간, 과거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거든요. 특히 아이와 부모 사이의 관계가 일방이 아니라는 그 지점에서, 권력의 작동에 관한 푸코의 문장이랑 아스시 난디의 문장도 떠올랐구요.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이더라구요. 참 잘 쓴 글이기도 하구요. 정희진쌤의 추천글이 괜히 나온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
근데 그런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셨다는 점에서 역시 정희진쌤... 그런 생각도 했었더랬죠. 아, 리뷰 쓸 수 있을 것인가....

책읽는나무 2024-03-31 07: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마. 김치 냉장고 위 치웠어요.˝
ㅋㅋㅋㅋ
어머님 정말 흐뭇하시겠습니다.^^
이모티콘도 쓰시고...어머님 멋쟁이셔요.
예전에 지인 한 분이 친정 어머님이 집에 오시면 김치 냉장고 위를 매번 치워 주시고 위에 아무것도 올리지 말고 살아보라고 포스트 잇 메모를 붙이고 가셨는데 어머니 가신지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도루묵이 되더란 말이 생각납니다.ㅋㅋㅋ
우리 집은 아빠가 계셔서? 김치 냉장고 위를 치우지 않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ㅋㅋ
대신 아빠는 김치 냉장고 위에 올려둔 시계를 못보겠다고 하십니다. 그 시계 앞에도 뭔가 자꾸 쌓여서 시계를 가려버리고 있거든요.
김치 꺼내기 참 힘든 세상이에요.ㅋㅋㅋ

엄마, 여성......늘 양가적 감정을 달고 살아서인지 단발 님의 이런 글이 참 좋아요.
저도 애들 어릴 때 집에 누가 방문하면 서로 손님에게 말 걸기 바빴던 적이 떠오르네요.^^
책들...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라....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게 하는 좋은 책들인가보다. ✍️하고 갑니다.^^

단발머리 2024-04-02 08:49   좋아요 2 | URL
저의 집의 마지막 보루 김치 냉장고 위를 과자와 쿠키, 음료와 책, 노트, 필기구가 장악한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이 쌓아두다 보니 김치 꺼내기가 귀찮아서 그냥 김치 없이 밥 먹을 때도 많았구요ㅋㅋㅋㅋ 아이구야 ㅋㅋㅋㅋㅋㅋㅋ
김치를 위해 우리는 김치 냉장고를 샀지만 김치 꺼내기 힘든 이 세상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이번 봄을 맞이해 집 좀 치운다고 여러 계획을 세웠으나 모두 지지부진한데요. 바퀴 달린 작은 서랍장을 샀어요. 거기에 과자, 쿠키, 음료, 책, 노트를 모두 옮겨서, 일단 식탁 위와 김치 냉장고 위를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거실과 책장과 옷장과 신발장만 정리하면 됩니다. 미니멀리즘으로 돌아오는 단발머리되겠습니다!!

서로 손님에게 말 걸기 바쁠 때 정겨운 모습인 건 맞는 거 같아요. 후배가 아직도 그 날이 기억난다고 종종 웃는 얼굴로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시길 바래요, 책나무님! 서울은 오늘, 낮에 따뜻하다고 합니다!

독서괭 2024-04-03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 김치냉장고 치워뒀다는 카톡 너무 귀엽네요♥
엄마라는 이름에 너무 많은 걸 전가하는 것.. 그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 왔지요. 저도 엄마에게 다정해야겠어요. 자주 안 보고 가끔 도움만 받으니 이젠 짜증낼 일은 별로 없지만, 엄마가 더 나이드시면 또 어떻게 될지..
저는 아이들이 제 탓 하면 반드시 따지고 듭니다. ˝왜 엄마 탓을 해? 네가 속상한 건 알겠어. 그런데 왜 엄마 탓을 하지?˝ 하고 짚고 넘어갑니다. 준비물 못 챙겨준 때도 당당하게 ˝네가 챙겼어야지˝하고 말합니다 ㅋㅋㅋ

단발머리 2024-04-04 09:32   좋아요 0 | URL
제가 김치냉장고 위에 책이랑 과자 쌓아두어서 김치를 못 꺼내먹는 역사가 하도 길어서요 ㅋㅋㅋㅋㅋㅋ 예전에 살던 곳에서도 비슷한 형국 ㅋㅋㅋㅋㅋ 그래서 치운김에 자랑했네요^^
저는 독서괭님의 응대&태도가 옳다고 봅니다. 당연히 준비물, 자기가 챙겨야지요. 저는 그걸 조금 늦게 시작해서 처음 그 이야기 했을 때 얘가 놀라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앗! 이게 내 일이었구나!를 깨닫는 순간, 인생은 혼자라는 깨달음 ㅋㅋㅋㅋㅋ독서괭님 정말 잘하고 계세요. 언니~~ 라 부르며 따라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언니~~라 부르지 않으며 따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