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을 높이기 위해 회사는 노동자의 이산화규소 노출을 줄일 수분 공급 천공 방식과 방진마스크를 사용하지 않고 작업의 속도를 올렸다. 노동자들은 치명적인 분진 더미에 노출된 후에 이내 사망하기 시작했지만,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 노동자들에 대해 관심이 없던 지역 신문사들은 공사 개시 이후 약18개월 동안 이에 대해서 어떤 뉴스도 싣지 않았다. 서둘러 입을 막은 회사의 정책은 의심할 바 없이 재해의 최초 국면에 침묵하도록 만들었다. 여러 죽음들이 보고되기 시작하자 그 원인은 '검둥이들'의 비위생적 생활방식과 ‘폐렴에 대한 선천적 취약성' 탓으로 간주되었다(체르니악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일부 마을 주민들은 죽음의 원인을 "폐렴과 너무 많은 술과 포커"라고 주장하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를 비난했다고 한다)." (119쪽)
이런 문장을 읽게 되면,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난 요즘 ‘제대로 읽는다’에 문장에 말 그대로 꽂혀 있는데, 그건 내가 제대로 읽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과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그리고 내 이해에 대한 불신이 총체적으로 합체되어 만들어진 나의 현재 상황, 나의 현실이다.
나의 의심은 인용된 문장 그대로다. 열악한 작업 환경과 오염 물질 때문이 아니라, 흑인들의 비위생적 생활방식과 폐렴에 대한 취약성 때문에 산업 재해가 발생했다는 생각이 당시에는 ‘주류적’이었다. ‘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주류’, 정확히는 ‘기득권’의 생각이 반영된 것임을, 기득권에 속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당연히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데, 사건 취재가 용이했을 지역 신문사들이 공사 개시 이후 18개월 동안이나 이를 이슈화하지 않았던 데는 명확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죽음이 보고된 이후,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검둥이들’의 비위생적 생활방식과 ‘폐렴에 대한 선천적 취약성’이다. 즉, 흑인들의 생물학적 특성, 주로 열등성으로 구체화되는 흑인들의 ‘특이성’이 이런 산업 재해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주장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주장이 힘을 얻었고, 실제로 인종 간의 차이를 이렇게 부조리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생각들이 현재에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김승섭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는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일본 지식인들의 노력을 서술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서구 인종 과학의 약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우리가 중국인이나 조선인보다 우월하다’라는 또 다른 논리가 함께 필요했다(161/815). 일본인 해부학자 구보 다케시는 1907년부터 대한의원의 교수로 조선인의 신체, 뼈와 근육, 신경의 크기를 측정하며 기록했는데, 다케시는 그의 논문에서 “조선인의 소화기와 치아가 일본인보다 발달한 것은 익히지 않은 음식을 먹는, 야만에 가까운 식습관 때문이고, 조선인의 뇌가 작은 것은 민족의 대다수가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166/815)”한다.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에 맞춰 생산된 지식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인종과 민족만큼 혹은 인종과 민족의 분류보다 더욱 정교한 방식으로 집단을 ‘전체’로 규정한 실례는 ‘여성’일 것이다. ‘교양 있는 남자들의 우아한 여성 혐오의 역사’라는 부제를 가진 <여자라는 문제>에서는 여성의 사고력에 대한 당시의 생각을 이렇게 보여준다.
여성은 섬세하기 때문에, 연약하기 때문에, 감정적이기 때문에 학문과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들이 사회를 지배했고, 여성은 가정생활,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특화된 존재라는 믿음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불합리한 통념은 종교의 이름으로, 문화의 이름으로, 그리고 과학의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아직도 우리는 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흑인은 열등하며,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야만적이며, 여성의 뇌는 ‘공부’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 생각들.
아빠의 생파를 위해 점심에는 외출을 했다. 아빠, 엄마, 큰아이와 같이 갔다. 오랜만에 평일에 한가해지신 이모도 함께했다. 막내이모.
막내이모와 점심 먹고, 이제 앨러이모 만날 시간이다. 현재 스코어, 176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