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아홉 살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큰아이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시고 많은 시간을 보내셨던 시아버지에게 이제 제법 커버린 큰아이가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나 보다. 우리 **이가 어려서는 안 그랬는데. 우리 **이가 할아버지 옆에 잘 왔었는데, 하시며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시는 거다. “아버님, 이제 **이가 많이 컸어요. 제 곁에도 안 오려고 해요.” 이렇게 시작을 하니, 나도 모르게 그즈음 읽었던 육아서의 어떤 문장들이 떠오랐다.

 


아버님, 아이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가 각각 다르기는 하지만 장세포는 한두 달 안에 바뀌고, 다른 세포들도 순차적으로 바뀌잖아요. 6-7년 안에 모든 세포가 다른 세포로 대체돼요. 이 아이는 아버님이 5년 전에 안고 계시던 그 아이가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그래서 아버님, 그때는 얘가 어렸고, 이제 진짜 자기 성격이 나오나 봐요. 근데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고 시크해 보이는) 이게, 얘에요.” 변했다고 생각하는 아버님도, 현재가 아이의 본 모습이라고 말한 나도 틀렸다. 아이는 그 아이가 아니고, 이 아이는 또 변해버린다. 같은 이름, 과거의 사진으로 아이를 잡아 두려고하지만, 아니다. 이 아이는 그 아이가 아니고, 이 아이는 지금의 내 아이와는 다른 사람이다. 본질적인 정체성이라는 건 없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 책에서 제일 먼저 밑줄을 긋게 되는 단어는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18)이다.

 


인간을 자연의 정복자로, 군림하는 주인으로 인식하는 세계 속에서 자연 파괴와 환경 오염은 인간 도구의 손실이며, 그 결과는 인간에게 해악으로 작동한다. 문명의 대표자이자 유일한 승계자인 인간에게 자연은 자원으로서존재할 뿐이다. 환경정의에 관한 책, 자연에 대한 책, 인간의 반성에 관한 책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는 지점에 이 책이 있다.

 


예를 들면, 생물학적 몸을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는 버크는 몸을 "변화하고 있고, 변화 가능하며, 변신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세포는 "지속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고", 뼈는 "언제나 리모델링하며", "신체 내부들은 지속적으로 내부 또는 외부의 변화에 반응하고, 세계에 영향을 행사하고있다". (26)

 


변화하는 몸. 리모델링되는 뼈와 변신하는 세포들. 내부 또는 외부의 변화에 반응하고, 그리고 바깥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신체. 저자가 주창하는 대로,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결정론에 쉽게 승복하지 않고,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에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당연히 주체성 개념의 전환’(63)에 맞닥뜨리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는 무엇일까. 그 어떤 경우에라도 훼손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공인되는 건 무엇일까. 인권이 아닐까. 다른 말로 하면, 현대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무언가를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그것이 혹은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집단이나 단체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로서의 개인’. ‘개인이라는 관념은 근대 서구에서 발명된 것이다. 한국 전쟁 이후, 농업 중심의 밀집 사회에서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면서 개인에 대한 갈망은 공동체 중심의 한국 사회 전반에 강력하게 작동했다.

 


국가, 지역, 친족, 대가족까지 나의 확장인 우리로 여겨지던 시대가 그렇게 끝났다. 이제 아이들은 함께 살지 않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우리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개념이 축소될수록 개인의 개념은 더 확고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라는 집합에서 구별되는 ’. 내 생각과 느낌에 더 큰 신뢰를 품게 되고, 내 시간과 공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바야흐로, ‘가 주인인 세상이 왔다. 호오의 결정이 이루어지는 지점. 그 판단의 최종 심급은 나. 바로, ‘이다.

 


사회정의를 위한 민권운동과 차별 철폐 조처affirmative action,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개인을 몸의 안과 밖의 경계가 분명하고 유기체적인 개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간 몸과 보건, 인권이 특정 장소의 물질 - 종종 독성 있는 물질 - 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그러한 운동의 성격이 심오하게 바뀔 것이다.

 


위 문단 속 여러 정치 운동의 시작점은 당연히 개인이다. 인종으로, 성별로, 계급으로 구별되는 ’, ‘라는 구체적 대상에 대한 차별, 모멸, 박해, 폭력이 이러한 운동의 원인이자 원동력이 되어 왔다. 하지만, 만약 우리 인간이, 한 개인이 그렇게 고정된 물질이 아니라면? 몸의 안과 밖의 경계가 분명하고 유기체적인 개체가, 아니라면? 우리 인간이 그렇게 닫힌존재가 아니라 좀 더 열린존재라는 걸 인정한다면?

 


의 몸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의 범위는 유동적이며, ‘의 내부는 외부와 영향을 주고받는다. ‘는 끝없이 확장된다. 그제야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자연이 아닌 살된 존재fleshy beings(19)로서의 환경과 마주 할 수 있다. 제대로 혹은 정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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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2-15 20: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리뷰 읽으니 책에 다가간 느낌입니다.^^
전 펼쳤다 첨부터 벽을 느꼈네요.
만만치 않군, 어렵군! 이런 벽이요.
계속 읽으면 읽을만해질까나요?
다시 도전할지 고민중입니다.

단발머리 2024-02-15 21:44   좋아요 2 | URL
책에 다가간 느낌이시라니 너무 좋네요. 이제 제가 더 가까이 다가갈 차례입니다.
저도 많이 어렵게 느껴지기는 한데 지난달(<공포의 권력>)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읽는 중입니다.
전 너무 어려울 때는 그래, 이 책은 밑줄긋기라도 정리해 두자, 이렇게 생각하며 읽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가벼워서 책장이 잘 넘어가기도 하구요.
다시 한 번 도전하시기를........... 소심하게 권해드려요, 은하수님! 저도 그런 마음으로 읽으려 합니다! 😅

다락방 2024-02-16 10:18   좋아요 2 | URL
은하수 님, 화이팅!!
저도 아직 1장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2024-02-16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16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4-02-16 10: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 님은 벌써 완독하시고 리뷰 적으셨더라고요?
오늘 단발머리 님의 이 글을 읽으면서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하면서 다른 분들의 같은책 다른 감상 보는게 즐거웠지만, 이번 책에 대해서는 더 그런것 같아요. 저도 천천히 읽고 있어요.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고요. 어렵지만, 공포의 권력에 비하면야 읽을만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렇지만 다른 분들의 이 책 관련 글을 보면서도 뭔가 뿌듯하고 똑똑해지는 느낌입니다. 만약 제가 잘못 이해한다면 여러분들이 다 잡아주겠거니 하는 믿음도 생기고요.

저는 아직 1장 읽는 중이지만 도나 해러웨이와 크리스테바 생각났거든요. 그에 대해서 정리해야지 하고 있는데 못하고 있어요. 주말에라도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빠샤!!

자, 우리 독서 화이팅!!

단발머리 2024-02-16 10:35   좋아요 4 | URL
저도 시작하자마자 느낀건데 뭐랄까... 생각의 방향이 제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쪽이어서요. 제 수준에서의 짐작을 좀 덜어두고 읽어야겠다, 그런 생각은 들었어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가 읽는 일에도 도움이 되지만 다락방님 말씀대로 쓴 글을 읽으며 서로 배워가는 시간이 참 좋은것 같아요. 각자의 밑줄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또 그걸 발견하는 시간들이요. 이 책이야말로 ‘알라딘 대중지성‘의 힘을 모아야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지난달에도 그랬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힘내서 더 읽어보자구요! 뽜야!!

책읽는나무 2024-02-26 0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펼쳐서 읽다가 아차, 싶었어요. ‘페미니즘과 환경정의‘란 소제목만 보고 읽다가 제가 생각한 그런 내용이 아닌 것 같아 독서의 방향을 잡고자? 얼른 들어와 다른 분들의 글을 읽어보고 있어요. 단발 님의 글은 역시^^ 지성적인데도 뭔가 따뜻함과 친근함이 있어 참 편하게 읽힙니다.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책을 어제 읽기 시작했는데 좀 어려워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읽어보려구요. 저도 단발 님의 시선으로 읽었으면 좋으련만....지식이 좀 부족합니다.ㅋㅋㅋ 그래도 열심히 열독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4-02-27 21:10   좋아요 1 | URL
우리 책나무님은 너무 겸손하세요. 저도 배우고 싶은 품성입니다.
좋은 글이라 칭찬해 주셔서 제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부족한 점이 많은데 책나무님이 편하게 읽힌다고 하시니, 제 마음이 너무 좋아요. 이 책 어려워서 쉬엄쉬엄 가고 있는데 책나무님 댓글에 운동화끈 다시 매고 열심히 달려보렵니다. 책나무님 독서도 화이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