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사라진 세상이 열렸다. ‘NSTRA-14’라는 신약을 통해 인간은 통증에서 탈출하고, 그로 인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다. 고통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단체는 이 약품이 인류를 파멸시킨다고 주장하며 제약회사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고. 대략의 줄거리가 이렇다. 뒤쪽에 내가 좋아했던 부분은 중요한 스포일러여서 말할 수 없을 것 같고. 정확히는 말해서는 안 되고. 정보라를 한 번도 안 읽어보신 분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보시라 추천해 드리고 싶다. 나는 좋았다. 아주 많이.
시간을 들여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지금 읽고 있는 소설에 끌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재의 특이성이나 문체 혹은 문장이 중요한 사람이 있을 테고, 전체적인 틀, 구조를 중시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서사를 끌어가는 힘에 기댄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내가 제목만 보고 이 소설을 좋아했던 이유는, 주제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렇다고 소재라 말하기도 어쩐지 어색하지만, 이 소설이 ‘고통의 문제’를 정면에 두었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해 말하는 소설, 고통에 맞서는 소설, 고통에 관해 묻고 대답하는 소설을, 나는 좋아한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육체가 경험하는 감각과 사고를 언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있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그 어떤 표현의 방식도 결국은 불충분하다.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128쪽)
정희진쌤은 오디오 매거진에서 ‘거식증’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내 몸은 나의 것이다’는 옳지 않은 언설이며, 정확한 건 ‘내 몸이 곧 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의 세계는 나의 몸 안에서 펼쳐지고, 내 몸의 한계를 벗어났을 때, ‘나’는 좀처럼 그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고통은 제한되고 한정된 우리의 육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내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일을, 외부에서는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On Suffering’, <고통에 관하여>이다. 고통은 말해질 수 있는가. 말해지는 고통은 누구의 편에서 말해지는가. 고통을 당하는 사람? 아니면 고통받는 이를 지켜보는 사람?
제목에 ‘고통’이 들어간 책을 대학 때 2권 읽었다. (참 소박하구나ㅜㅜ) 하나는 손봉호 교수의 <고통받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C.S. Lewis의 <고통의 문제>이다. C.S. 루이스의 책은 대학 다닐 때 그의 책을 연거푸 찾아 읽다가 읽었고, 손봉호 교수의 책은 정말 궁금해서 읽었던 것 같다. 고통, 인간과 고통, 고통받는 인간. 아무런 기록도 남겨놓지 않아 세세한 감상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인간 삶에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라는 식의 약간 힘 빠진 결론이 대강 기억에 남는다.
나에게 고통/통증이란 중고등학생 시절 ‘생리통’을 뜻한다. PMS라는 말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고, 여성이라면 누구나 생리 전, 생리 당일, 생리 후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진통제를 계속 먹으면 중독이 된다는 출처가 불분명한 ‘의학 정보’ 때문에, 매달 나는 고통의 시간을 참고 또 참아야만 했다. 생리를 시작하면, 반 친구들이 모두 그 사실을 알 정도로 증세가 심했는데도, 약을 먹지 않은 채 책상을 부여잡고 그 시간을 견뎌냈다. 지금이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참사랑과 희생정신의 현현, 지극정성 모성의 화신이시다. 우리 엄마가 그런 엄마라는 걸 알기에, 매달 (규칙적으로) 방을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 지르는 나를 볼 때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있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차라리 너 대신 내가 아팠으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는데 이 고통은 나에게만, 내 몸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고. 게다가 엄마는 평생 생리통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신 분으로서, 도대체, 왜, 이 평범하고 특별하지 않은 일이 내 딸에게는 이토록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는지 알지 못했다. 알 수 없었다. 다른 반에 놀러 갔다가 엎드린 친구를 보았는데, 생리를 시작해 엎드려 있다는 다른 친구의 말을 들으면, 눈물이 났다. 어떤 아픔일지 난 아니까. 아, 너도 아프구나. 지구의 반이 여성이고,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라면 생리통에 대해 알고 있겠지만, 나는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더 아팠고. 하지만, 내 아픔은 어디까지나 나만 알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혼자서 아팠다.
그 아픔의 강도를 확인한 때가 큰아이를 낳던 순간이었다. 새벽 4시에 양수가 터지고 종일 진통하고 그날 오후 7시 쯤에 아이를 낳았는데, (양수가 미리 터져) 마른 아이를 낳을 때의 진통을 논외로 하고, 형광등이 흰색이 아닌 ‘노란색’으로 보이기 전에, 나는 분만실에 들어갔다. 분만실에서의 경험은 좀 다르다고 할 수도 있지만, 진통을 겪어냈던 긴 시간, 그러니까 인간 고통의 극한의 지점 중 하나인 출산의 고통은 평소 생리통이 심했던 때보다 조금 더한 정도였다. 인간으로서 내가 겪을 수 있는 고통을 10이라 했을 때, 출산의 고통을 8.7~9.3으로 상정한다면, 생리통은 7.4~8.2정도의 고통이었던 셈이다.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다) 다른 말로 하면, 출산의 고통에 가까운 고통을 매달, 반복적으로, 주기적으로 겪어왔던 셈이다.
그래서 더더욱 정보라의 말이 옳다.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는 인간(128쪽)이 자신의 고통을 아무리 호소한다 해도, 그 상대편이 지극한 공감의 소유자라 해도, 결국 완전한 의사소통이란 불가능하며, 그녀/그는 끝내 내 고통을 알 수 없다. 나의 고통을 헤아릴 사람은 결국 나뿐이다. 나만, 오직 나만이 내가 얼마만큼 고통스러운지 알 수 있다.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 만약 이 문장이 정보라의 생각을 보여준다면, 나는 정보라와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고통에 의미는 없으며 고통을 겪고 나면 사람은 초월이나 경험이나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몸과 마음이 지쳐 쇠약해질 뿐이라는 욱의 절망을 한은 의미와 목적으로 바꾸어주었다. 욱은 한의 말을 믿었다. (131쪽)
-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285쪽)
고통을 통해 인간의 인격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진다는 믿음은 환상에 가깝다. 고통을 겪은 인간은 더 옹졸해지거나 더 비겁해진다. 고통당할 때의 바램은 오직 한 가지, 고통이 ‘끝나는 것’ 뿐이다. 계속되는 고통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도 이 고통이 끝나리라는 희망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날이 덥지만, 날이 춥지만, 아프고 외롭고 슬프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고통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인생은 결국 고통을 최소화하는데 몰입하게 될 것이다. 인생사 모든 번뇌의 핵심인 인간관계 필요 없다. 무자식이 상팔자니 자식도 필요 없다. 노력, 절제, 인내 모두 필요 없다. 통증은 진통제와 더 강력한 약물로 치료하고, 욕망과 충동과 쾌락의 추구만이 용인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고통을 피하는 쪽으로.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고통의 시간을 연단과 훈련의 시간으로 이해하기는 한다. 그게 와장창 깨진 게 그 유명한 <욥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기에, 좀 더 읽어봐야 한다. <박영선의 욥기 설교>를 석 달째 읽는 중이다.
정보라의 책을 몇 권 더 찾아본다. <저주토끼>는 아무래도 내게는 불가능할 것 같아 패쓰하지만, 다른 책들은 도전해 볼만 하다. 특히 외계인 나오는 책에 구미가 당긴다. 아침에 읽은 기사에서는, 지난달 초 120광년 떨어진 K2-18b 행성의 대기에서 지구에서 해양 생물에 의해서만 생성되는 가스 신호가 감지됐다 하고, 목성에서도 생명체 발견의 기대감이 높다고 했다. 진짜 외계 생명체 만나기 전에 좀 읽어 두어야겠다. 최근 알라딘 서재에서 핫한 <거장과 마르가리타>도 정보라씨가 번역했다 하니 기대감이 샘솟는다. 기대만발 개봉박두!
마침 이런 좋은 행사가 있다니...... 기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