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정말 오랜만에 독서 모임 언니들을 만나기로 했다. 갈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 서둘러 보내고, 빨래를 돌리고, 동작을 건너 뛰어가며 45분짜리 요가를 20분 만에 끝내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꺼내고 일부를 건조기에 넣고, 그리고 청소기를 한 바퀴 돌린 후, 샤워를 하면 나갈 수 있겠다 싶었다. 건조기에 들어갈 옷과 옷걸이에 걸어야 할 옷을 분리하면서, 나는 이 일을 모두 끝내야 언니들을 만나러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두르자, 얼른. 서둘러! 이 일을 다 끝내야 놀러 갈 수 있어. 팥쥐 엄마 없는데도 나는 콩쥐인가. 신데렐라도 아니면서 이 모든 일을 끝내야만 나가 놀 수 있다니.
오늘 퇴근하고 나서는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고 엄마표 가지전을 씹으며 세탁기에 빨래를 넣었다. 아침에 깎아 둔 복숭아를 먹고 나서 바로 청소기를 꺼냈다. 청소기를 한 바퀴 돌리고 나면 빨래가 다 되었을 테고, 빨래를 꺼내 건조기에 넣고, 샤워를 하고 나면, 나는 다시 놀러 나갈 수 있을까.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을 읽고 있다. <감시와 처벌>로 가는 길이 이토록 머나먼 길인지 몰랐도다. 푸코에게 가는 길에 품이 이렇게 많이 들 줄 몰랐도다. 이틀 동안 읽고 이 문단을 주웠다.
푸코는 지식을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연속적 실체로 보지 않는다. 다음으로 푸코는 지식을 이성적 사유 행위의 결과로 보면서 그 지식에 보편적 진리의 자격을 선험적으로 부여하는 계몽주의적 논리를 거부한다. 푸코에게 지식은 이성적 사유의 힘에 추동된 것도, 보편적 진리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시대에 따라 뚜렷한 차이와 단절을 보이는 불연속적인 것이며, 순수한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 당대의 다양한 물질적, 비물질적 조건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식은 결코 시대를 뛰어넘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119-120쪽)
지식은 결코 시대를 뛰어넘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는 푸코의 ‘지식에 대한 관념’은 페미니즘에 닿을 수밖에 없다.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생각, 여성은 천성적으로 모성에 적합하다는 통념, 여성은 성적으로 소극적이라는 믿음, 이러한 ‘지식과 지식들’은 그러한 지식이 만들어진 시대 상황 속에서’만’ 진리로 작동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페미니즘은 ‘아니야, 여성도 남성만큼 이성적이야’라고 응대하지 않는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야?’라고 묻는다. 그 지식이 만들어진 ‘시대’를 묻고, 그 지식이 사회와 문화, 종교와 관습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논증한다.
부지런히 읽어도 끝나지 않는 머나먼 길. 내게는 자갈치가 있으니. 푸코 헤어스타일을 참고해 일부러 고른 것은 아니었음을. 굳이 밝혀 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