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불의 신부(3) : 그를 사랑했던 나
제인 에어를 사랑하는 이유




 
















지난주 징검다리 휴가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 (피곤하다면 집에서 쉴 것이지 --- 집에 있으면 집안일 해야 해서 나갑니다. 이래 봬도 제가 주부랍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가는 길에 책 몇 권을 팔고(여러분, 제 책은 진짜 완전 새 책이라 직원이 제가 책을 안 읽고 파는 줄로 알아요. 책 구매한 후에 희망 도서가 도착하면 도서관 책으로 읽은 경우엔 완전 새 책이고, 제가 읽은 소설도 거의 새 책이긴 합니다), 두 권을 샀다. 리베카 솔닛 책은 출판사의 획책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이 생길 정도로 새 책들이 줄지어 누워있었고, 이 책은 원래 안 사려고 했는데 책 상태가 좋아서 샀다.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제목에 혹해서.

 


<신성한 제인 에어 북클럽>이라고 제목을 정한 이유가 있겠지만 원제는 <Praying with Jane Eyre>이어서 한글판하고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한글판 제목은 당연히 오스틴 북클럽을 연상시키는데, 그게 내가 이 책을 산 이유이기도 하다. 원제를 통해 추측하자면 이 책은 <제인 에어>기도하듯이 읽겠다는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 추측은 적확하게 옳다.  

 


제인 에어에 관한 책이니 제인 에어 혹은 작가 샬롯 브론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혹은 나는 그렇게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다. 책장이 100쪽을 넘어가는 때까지도 제인 에어, 로체스터는 눈 씻고 찾아봐야 스치는 옷깃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앞부분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위대한 행동이란 무엇인가’, ‘진실한 환대란 무엇인가이고, 이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조부모/외조부모 네 사람과 그들의 자녀, 그리고 손녀인 저자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또한 민족적으로, 역사적으로, 심리적으로완벽한유대인이고, 문학을 전공한 무신론자 목사이며, 여성인 그녀의 개인적인 이력이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러 부분에서, 최근에 읽었던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삶에는, 쉽게 그 무게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것이 타자의 삶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혹은 말해지는 부분 이면에, 듣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1970년대 후반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나의 삶과 경험으로는, ‘1940년대 후반, 책만 읽고 일하지 않는 아버지 밑에서 셋째 딸로 태어나 밥 먹듯이 배를 곯았던 엄마의 삶을, ‘아무리 똑똑하고 야무져도 결국 남편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어 매일 달음박질하듯 여기저기를 오가며 자식들을 키워냈던 외할머니의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핏줄로, 기억으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타인이 도달하기 어려운 경험의 특정한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 어머니가 아우슈비츠 생존자라는 경험이 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그런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이 만든 가정. 그 가정의 분위기, 그 가족들만의 독특한 문화. 저자와 그의 부모, 그의 조부모/외조부모는 모두 아우슈비츠를 현재로 살아간다. 비극을 목도한 그들은 무신론자가 된다. 유대인의 전통과 문화를 전수하고 향유하는데 여념이 없지만,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밝히고, 그 사실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들은 무신론자다. 그 거대한 비극 앞의 침묵을 그들은 신의 부재라고 이해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경험이, 비극적이고 또한 운명적인 에피소드가 이 책에는 가득하다.

 

 



이제, 진짜 제인 에어 나온다.


 

나는 중학교 때 <제인 에어>를 처음 읽었고 그 후로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지만, 처음 읽었을 때부터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두 사람의 결혼식 날 밤, 즉 로체스터의 과거가 밝혀져 결혼식이 급작스럽게 연기되었던 그 밤,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이다. 정확히는 끈질기게 제인 에어를 설득하는 로체스터를, 나는 좋아한다.

 


물론이다. 로체스터는 나쁜 사람이다. 그는 아내를 다락방에 감금한 채로 제인과 결혼하려고 했고, 결혼 사실을, 현재 아내가 살아있음을 제인에게 숨기려 했다. 또한 제인에게 자신의 정부로 살아갈 것을 제안했고, 무력적인 방법을 시도할 의도가 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로체스터는 그 밤에, 끊임없이 제인을 설득한다. 그것이 어디까지나 로체스터의 입장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달라고 간청한다. 자신에게 주기로 한 애정을 저버리지 말라고 애걸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오직 그녀뿐이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나는, 그런 로체스터를 사랑한다.


 

나는 로체스터가, 그 불같은 성정의 로체스터가 제인에게 손 하나 대지 않았다는데 감동한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로체스터는 기혼자임을 감춘 채 20년 연하의 천사 같은 제인과 결혼하려 한 패악한 인간이며, 첫 번째 아내 버사를 동물 취급하고, 그녀를 감금했으며, 세계를 유랑하며 향락을 일삼은 쾌락의 화신으로그럼에도, 나는 로체스터가 제인에게 손 하나 대지 않았다는데 감동한다. 그리고,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한다, 이렇게


 

'세상에! 바네사, 그가 제인을 강간하지 않았다고요? 참 훌륭하기도 하네요! 남자가 "강간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만족하라고요?' 내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사실 상대를 충분히 진실하게 이해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 남자들 사이에서는 희귀하고 급진적인 태도임은 인정하자. 하지만 나는 로체스터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나는 너를 강간하지 않을 거야'의 의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244)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나는 여기서 만난다. 그녀가 또 쓴다.


 

이때는 남성이 아내를 합법적으로 폭행하고 정신병원에 보낸 후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시절이다. 백인 남성의 특권이 법의 부산물로서 어쩌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법으로 규정되는 체제가 작동하는 시대다. 그리고 그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바를 확실히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지만 그 모든 법과 돈과 체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복자가 되지 않기로 결정한다. 내가 볼 때, 그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심지어 제인의 영혼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다만 제인이 자신의 영혼을 자발적으로 보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 (244)

 



나는, 그가 자신이 원하는 그것, 제인의 영혼을 얻고자 할 때, 그녀에게 간청하는 이 부분이 너무 좋다. 사랑을 원하는 사람의 이 끈질긴 갈구를, 나는 사랑한다. 자신에게 주어질지도 모를 사랑의 가능성을 믿고,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그녀를 나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그 마음을,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그 애절한 마음과 진실한 사랑이 미친 집착과 부인할 길 없이 확실한 광기와 얼마나 가깝게 존재하는지도 안다. 그래서 소중하다. 그런 마음, 사랑을 갈구하는 그런 마음은, 그래서 소중하다

 

 















남자가 여자를 주저앉히기로 했을 때, 남자가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작정했을 때, 여자가 동의하지 않아 다른 수단이 보이지 않을 때, 폭력적이고 수준 미달의 남자가 취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 강간과 임신이다. 필리스 체슬러의 남편 이야기다. 체슬러의 남편은 그녀를 속여 카불로 데려갔고, 잠깐만 머물겠다던 그의 말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게 된 체슬러는 카불을 탈출할 기회를 엿본다. 그녀를 잃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체슬러의 남편은 최후의 수단을 강구한다.

 




Abdul-Kareem embarks on a campaign to impregnate me. He does not stop, even though he knows I am ill and weak. (<An American Bride in Kabul>

 



체슬러의 경험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다. 여자를 주저앉히고자 하는 모든 남자가 사용했던 방법, 여성을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제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강간임신이다. 이렇게 주저앉은 여성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자유민을 노예로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인 신체적 공포와 강압은 여성에게는 강간의 형태로 나타났다. 여성들은 강간에 의해 신체적으로 제압되었고, 일단 임신이 되면 아마도 심리적으로 자신의 주인에게 애착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노예제에서부터 축첩의 제도화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포로 여성들을 포획자의 가구에 통합시켜서 포획자가 그 여성들의 충성스런 서비스와 자손들을 확보하는 사회적 도구가 되었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154)

 

 


필리스 체슬러의 남편 같지 않았던 로체스터를, 정복자가 아니라 영혼의 동반자가 되기 원했던 로체스터를, 밤새 제인에게 간청했던 로체스터를, 혹은 그의 진심을, 나는 믿는다.

 

 


 


아무리 제인 에어를 좋아해도 이 표지는 진짜 아닌 것 같다. <제인 에어> 예쁜 장정을 한없이 찾아 헤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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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ora 2023-06-17 2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춘기 시절 가슴 설레며 읽었던 ‘제인 에어‘ 였는데, 머리가 굵어지면서 그 사실을 왠지 외면하고 살았어요. 아이돌을 좋아했던 시절을 모른척 하는 것처럼요ㅎ. 님의 글을 읽고 제인에어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대화하는 시간이 될 듯 합니다.

단발머리 2023-06-21 19:11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랫동안 제인 에어가 제 인생의 책이라는 말을 선뜻 못 했던 시간들이 있었거든요. 이름 발음하기도 어려운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게 근사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철없는 시절이었습니다. 다시 제인 에어를 읽게 되시면 그 때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눠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