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거나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성’을 매개로 한 억압이 우리나라의 특정한 상황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역사 혹은 추세였음을 말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좋아하는 미국 이야기.
하얀 피부의 특권층이어서 ‘변별 요소’가 ‘성’일 수 밖에 없는 백인 여성이 미국에서 겪는 일들.
부연하자면, 총에 맞아 죽은 여성들의 3분의 2 가까이는 현 파트너나 전 파트너에게 살해되었다. (49쪽)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 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 원인 중 첫 번째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49쪽)
리베카 솔닛이 밝힌 대로 ‘미국 여성의 부상 원인 중 1위는 교통사고가 아니다. 전남편, 전 애인, 전 남친 등 배우자의 폭행이다. 이 사실을 말하면 듣는 사람들은 모두 놀란다. 진짜? 하고 다시 묻는다.
또 한 가지 예는 마사 누스바움. <비평이론의 모든 것>에 그의 사례가 나온다. 하버드 대학의 대학원에 다니는 마사 누스바움이 자기의 가슴을 만지려는 교수의 손을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범위 내에서’ 살짝 밀어냈던 경험에 대해서 말한다. 똑똑한 여성이 교육 기회를 얻어 하버드에 입학해 석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상시적이고 일상적인 성희롱,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현실을 말할 때, 놀라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오래전에 사둔 책을 다시 펼친다. 어제 <행복의 약속>을 읽었는데 새삼 어려워서 노곤해지고 너무 졸려서 오늘은 책을 바꿨다.
23쪽의 ’나 역시 여성이다‘로 시작해 마지막 문장까지를 그대로 옮긴다. 억울하다고 소리치지 않으면서 지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용감한 사람인가 묻고. 한 번 더 생각한다.
나 역시 여성이다. 우리 사회의 다른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성희롱과 성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하버드대 대학원 교육과정에 대해 쓴 글에서 나는 두 명의 저명한 교수들로부터 내가 (다른 많은 이들과 함께) 맞닥뜨려야 했던 성희롱에 대해 쓴 바 있다. 빌 코스비(Bill Cosby)의 기소 직후 모두가 그를 유일한 '암적 존재'인 것처럼, 마치 그의 죄가 유별난 일인 것처럼 다룰 때, 나는 《허핑턴포스트》에 그와 유사한 경력을 가진 또 다른 유명 배우로부터 내가 당했던 성폭행에 대해 썼다. TV 드라마 「월튼네 사람들(The Waltons)」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랠프 웨이트(Ralph Waite)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는 타인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재능과 권력으로 인해 책임의 의무로부터 보호받아 온 사람이었다. 이 밖에도 나는 또 다른 인물로부터 데이트 강간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경험들에 대해 다시 말할 가치가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코스비 사건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목적으로 복기해 본다. 나는 나의 말하기가 피해자성 서사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관련된 모두에게 공정한 관점을 물색하고 있으며 살아가는 동안 늘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