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he Message 메시지 구약 시가서
연초마다 세우는 올해의 계획은 매년 비슷비슷하다. 성경 읽기와 영어 공부. 다이어트는 아니다. 성경 읽기와 영어 공부와 다이어트를 포함하지 않는 운동. 야무지게 읽어보겠다고 오더블도 구입했다. 오더블은 몇 달 이용하다가 환율이 너무 올라서 멤버십을 취소했는데, 작년 말에 4개월 동안 7.9 달러라고 해서 다시 가입했다.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길고, 가장 장수가 많은(150장) <시편>은 내게는 좀 특별한 성경이다. 길지 않은 인생, 말이 안 나오게 답답한 순간마다 시편을 펴서 읽는다. 미운 사람이 너무 미울 때 시편을 읽고, 기도가 안 나올 때 시편을 읽는다. 기쁨과 원망, 탄식과 기도, 노래와 찬양이 가득한 구절들 속에서 내 영혼은 잠깐 쉴 틈을 얻는다. 시편 49편 20절은 시편 49편 12절과 똑같다.
We aren’t immortal. We don’t last long. Like our dogs, we age and weaken. And die.
(Psalms 49 : 20)
2. Josh and Hazel Guide to Not Dating
친구들과 함께 읽는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집필한 책이지만 두 사람이 오롯이 녹아 있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읽는다면 당연히 눈치챌 수 없을 것이다. Christina Lauren도 필명이다.
I’m far more my mother’s daughter than my father’s, personality-wise, but I look exactly like my dad : dark hair, dark eyes, dimple in the left cheek, wiry and not as tall as I’d like to be. Mom, on the other hand, is tall, blond, and curvy in all the best snuggly-mom ways. (36p)
유전에서는 우와 열을 가르는 게 의미 없는 일이고, 그걸 선택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가까운 미래에 그게 가능해질 거라는 전망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세대에서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주인공 헤이즐은 외모는 아빠 판박이지만 성격은 엄마 쪽이다. 그 반대였으면, 하는 생각을 1초간 했다.
큰아이는 외모도, 성격도 제 아빠를 닮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지만, 한 번 싸우면 오래 간다. 작은 아이는 외모는 제 엄마와 아빠를 반씩 닮았고, 성격은 제 엄마를 닮았다. 우리 집에서 인기가 제일 많다. 나는 외모도, 성격도 아빠를 닮았다. 사고방식, 생활 태도, 인생관 자체가 비슷하다. 엄마가 나를 앞에 앉혀놓고 아빠 욕할 때, 팩폭처럼 느껴져 불편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고, 아빠를 싫어한다.
3. 눈먼 자들의 도시
모든 사람들이 눈멀었을 때 눈 뜬 사람, 사람들의 눈이 떠졌을 때 눈이 멀었던 단 한 사람. 지옥 같은 현실 한가운데서 윤리와 책임감, 용기와 연민이 그 여인 한 사람에게로 모인다. 인류 최후의 구원자는 여성이며, 여성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소설.
그 용감한 여인의 남편이 싫다. 나쁜 데다가 비겁한 그 의사가 싫다.
4.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다. 아렌트의 ‘국가 없음’ 개념을 중심에 두고 논의한 것임을 모르고 시작했다. 아렌트 님 너무 많이 나오신다. 특이 사항은 판형이 작고 분량이 적다는 것(140쪽). 한 자리에서 후루룩 읽을 수 있겠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고. 버틀러와 스피박이 누가 누가 더 어렵게 이야기하나 대결하는 건 아닌데, 쉬운 내용은 아니어서, 중간중간 건너뛰며 읽었다.
아렌트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사적인 영역(유색인종과 노예, 아동, 그리고 참정권이 없는 외국인이 물질적 삶의 재생산을 책임지는 영역)을 정치의 영역 밖으로 이해함으로써, 여러 인간 존재들의 ‘배제’를 통해 정치의 영역을 구성했다, 고 버틀러는 지적한다(23쪽). 정체성의 정치 반대편에 서 있던 아렌트가 유대인도, 페미니스트도 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의 비극을 ‘정치체의 부재’ 때문이라고 했을 때, 아렌트가 대안적 정치체로 생각한 것은 연방주의(30쪽)였다고 버틀러는 말한다. 『전체주의 기원』을 3분의 1밖에 읽지 못한 나로서는, 그 책을 얼른 읽고 이 책으로 다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자본의 전 지구화와 민족국가의 쇠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스피박은 국가의 재발명이 민족 국가를 넘어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로 진행한다고 보았다(76쪽). 다국적 자본의 힘이 개별 국가의 힘을 넘어서서 실제로는 ‘경제권’을 통한 ‘전 세계적 만능 통치’가 가능한 현재 상황에서 오래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건 확실한 듯하다.
버틀러의 이 문단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정확히는 이 문장. “하지만 자유를 요구한다는 것은 분명 이미 자유를 실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는 자유롭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수행적 발화 자체가 당장 나를 자유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유를 요구한다는 것은 분명 이미 자유를 실행한 것입니다. 또한 이를 적법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는 행동은 자유의 행사와 현실의 간극을 공적 담론 안에서 공표함으로써 그것을 가시화하고 결집시킵니다. (68쪽)
버틀러의 말을 잘 이해한다거나 버틀러의 사상에 크게 감동받아서는 아니고. 그냥. 버틀러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서, 그래서 읽는다. 내 스타일이다, 그냥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