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전날, 큰아이 방을 청소하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원래 책장까지 꼼꼼히 닦고 바닥 쓸고 하는 내가 아닌데, 그날은 책장 먼지 닦다가 얇은 책이 다른 책들 사이에 끼어 있는 걸 보게 됐다. 꺼내서 후르룩 넘겨보는데, 앗! 해러웨이! 도나 해러웨이 아닌가. 해러웨이 책이라면 제가 또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지요, 암요. 원래 이번 설 연휴에는 마틴 에덴 읽으려고 준비해 뒀었는데, 당장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은? 연휴 내내 이 얇은 책(총 106쪽) 한 권밖에 못 읽었다.
과학기술학 박사인 저자 임소연은 성형수술, 과학과 대중,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 현장연구 방법론 등과 관련해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책에서는 사이보그에 대해 주로 다루는데, 사이보그와 과학기술, 그리고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에 대한 해석과 그 전망을 밝히고 있다. 존재적 형식으로서의 사이보그(독립적인 인공물, 혼종적 주체)와 은유로서의 사이보그(존재적 경계를 넘어서는 관계 맺기에 대한 비유적 표현)를 다룬다.
사이보그란 무엇인가? 의 질문은 우리 자신에 대한 것(14쪽)이라고 저자는 쓴다.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경계를 만들고 싶어 하는가? 인간 정체성의 한계를 끝까지 지켜보려는, ‘영혼 있는’ 기계(데카르트)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인간 고유함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겠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처럼 인간을 ‘고도의 기계체’로 인정해 버리면 될 텐데 말이다.
제2세대 사이보그의 탄생은 해러웨이로부터 시작되는데, 해러웨이는 사이보그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사이보그 선언>은 1985년 <사회주의 논평(Socialist Review)>이라는 학술지에 처음 게재된 것으로, 새로운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대한 선언으로 평가받는다.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사이보그의 만남은 이전의 사이보그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완전히 다른 길로 나가게 했다(27쪽).
계급의 구조 대신 섹스/젠더의 구조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35쪽)의 경우, 여성을 단일한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고자 했다. (캐서린 맥키넌) 이런 경우, 여성들의 다양한 차이들이 삭제될 수 있기에, 저자 임소연은 이러한 주장이 서구 가부장제만큼이나 권위적이라고 보았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여성들이 ‘자신이 아닌 여성'으로 의식화되는 순간 수많은 차이를 갖고 있는 개별 여성은 거대한 하나의 여성에 가려져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구 가부장제가 원하는 것, 즉 남성 욕망의 산물로서의 여성일 때를 제외하고는 여성들이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만큼이나 권위적이다. (36쪽)
물론 이는 임소연만의 주장은 아니다. <도나 해러웨이>의 저자 조지프 슈나이더도 해러웨이의 주장을 이렇게 해석한다.
서구, 특히 미국에서 20세기 후반에 벌어진 '여성 운동과 페미니즘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목소리를 추구하면서, 일부는 마치 모든 여성에 대해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를 규정하는 하나의 경험이 실제로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 '여성의 경험'에 의존하는 글을 써왔다. 이러한 입장은 모든 실제 여성이 그들의 섹스/젠더라는 범주만으로 경험과 견해 면에서 함께 묶여 있다고 암시 혹은 주장한다. 해러웨이는 이를 전 세계 여성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삶과 닮은 점이라곤 거의 없는 헤게모니적 실천이라고 불렀다. 그는 "’여성됨’에는 여성을 자연스레 묶는 것이 없다"고 썼다. (<도나 해러웨이>, 119쪽)
정체성의 정치에 갇혀서는 안 된다. ‘여성됨’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해러웨이 페미니즘 정치학의 핵심이다. 여러 명의 필자가 함께 쓴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의 해제에서 정희진 선생님이 쓰신 바와 같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규범이지 현실이 아니며, 따라서 실체로서 남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12쪽) 페미니즘 이론에 있어서 이원론과의 경합, 이분법의 거부는 당연한 일이다.
오디오매거진 팟빵 <정희진의 공부 : 앎의 쾌락과 약간의 통증>의 첫 번째 에피소드 <공부와 독서에는 왕도가 있다 – 가성비의 방법론>에서, 정희진 선생님은 가성비 높은 공부법을 소개해 주셨다. 책과 싸우면서 읽어라. 책과 갈등하면서 읽어라. 영어로 표현하자면 against. 저자와 대항적 자세를 가지고, 결투하는 마음으로 읽어라.
그렇다면 임소연의 <사이보그로 살아가기>를 읽는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가성비 높은 공부를 위해서는 내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게 좋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성의 변증법>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문장 “ … (새로운 페미니즘 물결의) 목적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견고한 계급-카스트를 뒤집어엎는 것이다.(31쪽)”를 처음 읽었던 때를, 나는 기억한다. 여성됨의 경험을, 나 자신의 경험 10개와 나 자신의 경험 아닌 것 10개를, 지금 당장 말할 수 있다. <섹스할 권리>에서 아미아 스리니바산이 쓴 그대로다.
페미니즘은 여성 자신이 성 계급 sex class의 일원임을, 다시 말해 ‘성’ 혹은 ‘섹스’라는 것 – 인간 문명세계의 토대가 되는 자연적이고 전(前)정치적이며 객관적인 물질적 기반 –을 근거로 했을 때 사회적 지위가 열등한 사람들로 구성된 계급의 일원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섹스할 권리>, 8쪽)
이러한 의식, 의식화만이 정치, 사회, 종교의 기본값이 되는 남성 우월과 여성 혐오의 오천 년 가부장제의 본래 모습에 직면할 수 있게 한다. 임신과 출산, 재생산 노동, 돌봄노동, 감정노동, 꾸밈노동을 요구하며, 이를 여성의 ‘본성’과 ‘본질’이라 주장하는 그 모든 거짓말의 민낯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생물학적’ 여성의 ‘단일성’만을 강조하는 것에 유보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여성이 여전히 ‘second sex’로서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반-정체성의 정치’만이 강조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실패다. 나는, 내 입장을 정하지 못했고, 그런 채로 겨우 이 책 읽기를 마칠 수 있었다.
명절 다음날이고 연휴 마지막 날이라서 모두 늦잠 잘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양파를 볶고 고기를 굽고 된장국을 데워주고 나서 세 문단을 썼다. 나물로 비빔밥을 만들어주고 전을 데워주고 사과와 배를 깎아주면서 나머지 세 문단을 썼다. 이제 다 썼으니, 잔뜩 쌓인 설거지 하러 간다. 설거지 마치면 휴식 좀 하려니까, 곧 점심시간? 혹 나의 실패는 이런 가사노동 때문 아닌가. 어김없이 찾아오는 끼니의 부담감 때문 아닌가.
어제는 행복했는데. 어제는 아빠, 엄마랑 규카츠 맛집에 가고 커피를 마시고. 그만 좀 하라는 애들의 성화 뒤로 사진을 찍었는데. 어제는 좋았는데, 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