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성 을유사상고전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정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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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세어보니 이번에 이 책을 읽기 전에 2의 성이라는 태그를 달아 썼던 글이 30개가 넘는다올해의 책여성주의의 고전이런 페이퍼에 책링크만 붙여도 개수로 세지기는 하지만여기저기 다른 책을 읽다가도 금방 소환되는 책이기는 하다.

 

이번 2회독 말미에는 예전과는 좀 다르게 읽힌다고 느꼈다. 뭐랄까. 분노나 슬픔, 혹은 당혹스러움보다는 짜증의 감정이 주를 이뤘다. 예를 들면, 여성주의 책을 읽으면서 100번도 더 들었을 여성의 예속이 좀 더 날카롭게 들렸고, 이런 문장들.

 



여자는 기생충처럼 남자가 먹여 살린다. (677)



결혼은 여자를 사마귀 암컷으로, ‘거머리, ‘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결혼의 형태를 바꾸고 여성의 조건을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677)

 


한 페이지에 여성과 관련된 단어가 기생충, 사마귀 암컷, 거머리, 일 때, 그런 사실 판단이 이번에는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페미니즘을 대하는 혹은 바라보는 내 위치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남녀평등’, ‘여성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적어도 한가한 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잖이 내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걸 안다.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왔고, 어찌 되었든 현재 사회적 계약 관계에 의한 노동을 하지 않는 전업주부니까. 나의 상황이 그러하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고 자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위치가 기생충과 거머리라는 걸 확인하는 건 즐겁지 않다. 후회에 바탕을 두어 오늘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과거를 통째로 지울 수 없는데 어떻게 오늘을 다시 만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에이드리언 리치가 말하는 아이 없는 여성에 대한 감사’,  아이 없는 여성들의 연구와 학문 덕분에, 우리가 여성으로서 정신적인 영양실조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215), 보부아르의 『처녀 시절』을 보란 듯이 들고 다녔던 일본의 작가 사노 요코가 아이를 낳은 후에는 보부아르를 무시할 수 있었다는 말, ‘그래, 그래 너 잘났다. 자식이 없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지. 나는 사는 게 힘들어. 일상이 힘들면 생활이 철학이 돼.’라는 그 말에도 동의할 수 있다. (『문제가 있습니다』, 164)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에이드리언 리치가 아니라 사노 요코의 말을 되뇌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단순하고 명랑하며 매사에 긍정적인 내가 혹 아픈 건 아닌지, 최근에 스트레스받은 일이 있었는지 따져 보기도 했다.

 


페미니즘 읽기와 공부로도 연대할 수 있다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나의 예속이 결혼과 경제활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기생충과 거머리의 반복을 확인한 이상, 더는 이대로는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이혼하고 싶지 않고 이혼할 생각도 없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굴레 혹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돈벌이를 해야 한다는, 그것이 진정한 여성 해방의 첫걸음이라는 깨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통이 오래갔다. 환희에 차기에는 부담스러운, 나 자신의 책임을 일깨운 독서 시간이었다. 후련하고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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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30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30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30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30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30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30 1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30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10-31 11: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분량으로도 내용적으로 힘든 제2의 성을 완독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단발머리님.

우리 지난번에도 여러 차례 이야기 나눈 바 있지요. 저는 한 여성이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다른 여성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그렇게 굳이 내가 어떤 사람이다 말하지 않아도 여성주의적 실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발머리님이 지금 계신 자리에서 지금처럼 가족들과 살아가고 또 개인적으로 독서도 하면서 이렇게 글을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단발머리님은 최선을 다해 삶에 몰두하고 계신다고 저는 생각해요. 한 여성이 자신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는 것, 그게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며 또 기본적인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늘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단발머리 님!! 함께할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단발머리 2021-10-31 20:53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읽을 때는 저번과 달라서 여러 생각이 많이 떠오르더라구요. ‘한 여성이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여성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여성주의적 실천이 될 수 있다‘는 다락방님 말씀이 위로로 다가오네요. 독서와 글쓰기가, 게다가 우리 알라딘 같은 변방에서의 쓰기가, 세상에 대한 혹은 대항하는 특별한 의미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해요. 이번에는 더 개인적으로 느껴져서 복잡한 맘에 보부아르를 원망하고 말았네요.

다락방님이 계셔서,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모임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그리고 항상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1-10-31 13: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까 좋아요! 누르고 밥 먹고 이제 댓글 달러 왔네요..주말이라 더 바쁘네요ㅋㅋㅋ
단발머리님의 그 느낌적 느낌!!
저도 공감되는~~^^
헌데 다락방님의 댓글을 읽으니 아...그렇구나!!!또 공감되는!!!
이러다 공감만도 백 번 하고 가겠어요.

저도 읽으면서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문장들이 많아서 살짝 야단 맞는 듯한 기분도 들더라구요???
자존감 현저히 떨어져 한숨도 절로 나오고...좀 혹독한 책임에는 분명했던 것 같아요.
기혼여성들의 결혼생활편은 읽고 나서 감정이 너덜너덜~~ㅜㅜ
그래도 며칠 고민해 봤지만...어쨌든 우리는 계속 발전해 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계속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키워야 하고,가정이 잘 굴러가도록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 엄마이자 아내인 여성들인 거죠!!
사노 요코의 책도 읽어 보면 아주 진보적인 여성임에 틀림 없어요.어떤 면에선 사노 요코가 아주 합리적인 삶을 산 것 같아 보이기도 하구요..여러 똑똑한 여성들의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그래서 좀 더 똑똑한? 결론을 내려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영위해 나갑시다.
우리 그러니까.....결론은....
오래 오래 살아요.(참 희한한 결론이로다???)
주말 평안하게 잘 보내시구요~
사랑많은 단발머리님으로 빨리 뵙고 싶네요ㅋㅋ

단발머리 2021-10-31 23:39   좋아요 1 | URL
저도 특히 ‘기혼여성들의 결혼생활’이 좀 힘들었어요. 저의 고민은 오래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번의 <제2의 성> 읽기는 좀 다르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변화를 만들어가고 싶어요. 다만 오히려 이런때 용기가 안 나고 더 움츠려들고 그러네요. 따뜻한 말씀, 그리고 격려의 말씀 감사해요.
오래오래 살아서 알라딘 폭풍 수다 이어가요, 책나무님!!

공쟝쟝 2021-10-31 15: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대학교 때 좋아했던 가수 루시드폴의 앨범 책 이름이 <모든 삶은 작고 크다> 였어요. 내 삶, 내 가족의 삶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타인의 삶들이 작고 큰 상처로 이루어져 있어며, 내가 모르는 보이지 않는 노동과 노력이 고단함이 있다는 것을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계속 알아가요.(중략) 비타님 한테도 그런 댓글 달았었어요. 한계 속에서도 엄연히 자유가 있다고. 각자의 고유한 삶과 상처 속에서 할 수 있는 작은 결단들이 결국은 큰 전환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엄마가 매년 연말 마다 올해가 또 간다며 시집가라는 말만 안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ㅋㅋㅋ)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 삶을 미워하기를 그만두고, 지금과 앞으로의 내 삶을 좋아하기로 마음 먹는 것이 페미니즘 공부라고. 별로 안 미워했고 이미 좋기만한 삶이었더라도, 더 좋아하기를 마음 먹을 수는 있다고도 생각해요.
당신 삶이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당신 삶의 분열과 불만족을 야기하는 전제를 바로 보라는 보부아르의 주문이 이번에 단발님께는 조금 다른 삶의 선택을 해야겠다는 계기를 마련했다면, 단발님의 공부가 어떤 질적 전환을 이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그 방향으로 간다면 단발님은 조금 더 많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단발머리 2021-10-31 21:14   좋아요 2 | URL
페미니즘에 대해 쪼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쟝쟝님의 정의는 정말 최고에요. 내 삶을 미워하기를 그만두고, 지금과 앞으로의 내 삶을 좋아하기로 마음 먹는 것.
저의 고민은, 내 삶을 좋아하고 미워하지 않았던 제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자꾸 내 삶을 미워하게 된다는데 있어요. 자기부정을 하지 않은 채로 지금의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 아이들과 보냈던 내 젊음과 열정과 시간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 것,이 저의 목표에요. 자꾸 결심하고 또 결심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휘몰아치기도 하구요. 그래서 이번에 <제2의 성> 읽기가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페미니즘을 모른 척 하는, 혹은 모른 척 하고 싶어하는 기혼여성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구요. 쟝쟝님의 댓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쪼금 나서, 순간적으로 촉촉한 눈망울의 이모티콘으로 변신하기도 했습니다. 🥺🥺🥺
다정한 말 고마워요, 쟝쟝님!!

공쟝쟝 2021-11-01 08:41   좋아요 4 | URL
예전에 다리다님 페이퍼에서 페미니즘 공부이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깨달았다라는 제목 보고 아… 그것이로구나 한적 있었는 데…💕
기혼도 아닌데 혼인 앞두고 페미니즘 진짜 공부하기 벅찼었던 기억도 나고…
저도 굉장히 후회스러운 몇가지 이슈들이 있는데요, 다시 돌아가서 사백 오십팔번 생각해도 아마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결국은 그때의 저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지점에 가닿고, 그때의 그 충실함(?)이 한편으로는 그대로 이어져 지금의 제가 있다고 싶고. 지금에 와서는 보이는 헛발질들을 앞으로는 조금 줄이자, 제발 휩쓸리지말자, 나를 먼저 지키자! 이래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마. 모르면 몰랐지 알고는 안 살아지는 지점들이 있을테니까요. 기어코 모르고저 하는 사람… 그런 노력을 하는 타입이 아니잖아요, 우리! (우치다 타츠루 센세 생각나요.) 그러니 또 얼매나 열심히 살아왔겄습니까? 우리 참 고생했다 🫂
말은 이렇게 해놓고, 저는 요즘 엄청난 불안과 싸우고 있습니다…😔 한발짝 한발짝… 취해있지 않으려고, 나를 망치지 않으려고, 두눈 부릅떠요! 그리고 오늘은 월요일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또 쉬면서 열심히 읽고 그렇게 살아보겠습니다 🥰

수이 2021-11-01 10:07   좋아요 2 | URL
최고야 요즘. 엄지 척 오른손_ 엄지 척 왼손.

단발머리 2021-11-01 21:43   좋아요 1 | URL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완전히 이별하지 않으면서 나를 미워하는 것을 끌어안으면서 살아보려고 해요. 구비구비 우리가 살아냈던 시간들, 결정들, 과거들이 비슷한 듯 다른 듯 닮아 있는 것 같고요. 저는 지금도 헛발질에 후회하며 어제도 그제도 하루 100회씩 이불킥을 날리며... 그러고 있어요. 20년 뒤로 돌아가면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를 것인가. 다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쟝쟝님 말이 맞아요. 그 순간의 결정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고요. 다만....
쟝쟝님은 얼매나 열심히 살았왔을까요? 나는 그게 막 느껴지고 또 가슴 깊이 저며옵니다. 그대는 여기서 더 열심히 하지는 말고요. 짬짬히 쉬어주시고 또 알라딘에 글도 많이 써주시고, 저는 지금보다는 쪼금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렇게 다짐합니다.
오늘도 하루가 이렇게 다 갔네요. 수고많았어요. 굿나잇, 쟝쟝님!! 😘

단발머리 2021-11-01 21:43   좋아요 1 | URL
양손 엄지 척! 엄지척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