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평점 :
초봄의 어느 주말, 깔끔한 부엌 한쪽. 캐롤라인 냅은 더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티셔츠를 벗고 캐미솔만 입은 채 양모 스웨터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지고 있다. 키 162cm에 40kg. 툭 튀어나온 어깨와 뼈마디, 해골처럼 변해버린 팔을 그대로 드러내고서 그녀는 천천히 옷을 찾는다. 왜? 왜 그녀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어머니에게 전시하는가. 왜, 그녀는 이런 모습을 선택했는가. 왜 그녀는, 먹지 않는가.
지적이고 외양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한 외할머니와의 갈등 속에서도 캐롤라인 냅의 어머니는 자신을 강력하게 추동하는 예술의 힘을 믿었다.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끈질긴 구애의 시간을 지나 결국 그의 아내가 되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더 버거웠고, 예술가로서의 삶과 가정주부로서의 삶은 공존이 불가능했다.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식사를 준비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지루하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 어머니는 점점 자신의 필요에 무관심해졌고, 그녀의 희생은 한숨과 무표정과 오후의 두통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필요를 따라 살 수 없는 삶, 자기로서 존재할 수 없는 삶의 비극을 캐롤라인 냅은 그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그녀의 전시는, 사랑에 대한 갈구다.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려 한다.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몸과 불룩불룩 솟아난 뼈를 통해 말한다. 몸으로 말한다. 엄마, 보세요. 나도 엄마처럼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어요. 엄마, 나를 보세요. 뼈밖에 남지 않은 나를 보세요. 내게 먹을 것을 주세요. 내게 사랑을 주세요. 사랑과 관심을 제게 주세요.
캐롤라인 냅을 거식증과 섭식장애의 세계로 밀어 넣은 것은 욕망과 필요를 거절당한 어머니의 좌절감만은 아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와 ‘무엇이든 될 수 있다’의 주문이 반복되는 현대 사회에서 자유로운 삶이 펼쳐진 여성들에게는 더 아름다운 몸, 더 날씬한 몸이 강요된다. 허기로 인해 팽팽해진 배와 무릎뼈보다 얇아진 허벅지, 날카롭게 튀어나온 뼈는 그 환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인 동시에 도착지다. 음식의 유혹에 대한 당당한 승리, 허기에 대한 완벽한 정복을 거식증은 자신의 몸으로 구현해낸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에 대한 뿌듯함과 유혹을 이겨냈다는 기쁨, 그리고 욕망을 추구하는 자신을 벌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 연약한 육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을 통해 캐롤라인 냅은 알코올 중독 이면의 집착과 갈망의 두 얼굴을 파헤쳤고, 『명랑한 은둔자』에서는 관계 중독의 세계에서 탈출해, 고독을 유쾌하게 살아내는 법을 그려냈다. 『욕구들』에서는 ‘네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해라’는 달콤한 속삭임 뒤에 감춰진 다양한 욕구들이 다이어트, 쇼핑, 섹스에 대한 몰입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더 아름다운 몸에 대한 강박과 그 순간만큼은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소비 활동, 그리고 영원을 약속하는 섹스로의 초대가 여성을 더욱더 순종적이며 나약한 인간으로 만들어 간다. 아름다운 육체는 노화에 저항할 수 없으며, 새로 산 명품 가방 역시 세월의 흐름 속에 마모될 것이다. 변치 않겠다는 사랑의 왕국에 ‘영원’이란 단어는 없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 충족되지 않는 욕구.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원하는 것, 중요함이라고 표시된 선반에 들어 있는 것은 물론 연결이고 사랑이다.
냅이 전하는 희망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아기의 말랑하고 따뜻한 체중, 친구의 다정한 인사말, 조심스레 잡는 부드러운 손의 감촉은 새로 시작할 장소가 바로 여기임을 일깨워준다. 타인의 평가와 사회적 압력에서 벗어나 자신을 진정한 주체로 인식할 때, 연결과 사랑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경험한다. 고통의 시간을 투명하게 펼쳐낸 그녀의 용기와 통찰 덕분에, 나는 이렇게 그녀에게 연결되었고, 사랑에 대해 또 한 가지를 배웠다. 소중한 하루를, 또 한 번 그녀에게 빚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