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사랑이 한 일』을 읽고 있다.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는데 패러프레이즈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소설쓰기가 일종의 패러프레이즈라는 생각을 한다. 이미 쓰인 것을 다시 쓰고 풀어 쓰는 것. 그런 점에서 이 일은 번역하는 것과 같다. …. 그러니까 잘 번역된 글은 원작과 다른 글이다. 다른 글이어서, 다른 글이기 때문에 원작과 같다. 패러프레이즈도 다르지 않다. (243쪽)
얼마 전 한국 교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성경이 『메시지』 성경이다. 다종다양한 성경 판본을 가지고 있는 영어권에 비해 한국은 『개역개정』, 『현대어성경』, 『쉬운 성경』 정도였는데, 『메시지』는 한국 성경 판매 시장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메시지』는 한 사람(유진 피터슨 목사)에 의한, 의역에 가까운 번역이 그 특징인데, 그래서 공적 예배 시 사용되기 보다는, 개인이 가정에서 혼자 성경을 읽을 때 유용한 ‘통독용’ 성경으로 널리 알려졌다.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이라는 광고 문구처럼,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거나, 성경적(?) 표현에 익숙한 교인들에게 ‘낯선’ 느낌의 성경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미국판 『The Message』는 이 책을 ‘best-selling paraphrase of the Bible’ 혹은 ‘a translation of Scriptures’라고 소개한다. 의역이되 ‘성경’이라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한 한국과 ‘paraphrase’, 성경 ‘다시쓰기’로 이해하는 미국의 차이를 보여준다. 어차피 성경은 ‘번역’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기에, ‘성경 읽기’란 결국 ‘다시 읽기’이다. '다시 읽기'일 수 밖에 없다.
사라의 종 하갈은 사라에게 아이를 낳아주기 위해 아브라함과 동침한다. 이는 명백하게 사라의 요청이다. 하갈은 사라의 요구대로 아브라함의 아이를 가졌지만, 그 때부터 사라의 질투가 시작된다. 아이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하갈은, 사라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면서 더 자주,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른 아침, 아브라함은 하갈에게 이스마엘을 깨워 데리고 나오라고 이른다. 크고 붉은 해가 성큼 떠올라 눈을 찌푸릴 수 밖에 없는 그 곳에서, 광야 한 복판에서 아브라함은 모자를 남겨두고 떠난다.
그녀는, 그분이 너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지?라고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이 너를 사랑하는 걸 잊지 마라,가 아니라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는 걸 잊지 마라,라고 했어야 한다고. (61쪽)
나는 이 대목에서 조금 놀랐다. 어떻게 하갈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이것이 정말 하갈의 생각이었는지 궁금했다. 종이었던 하갈이,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종이었던 하갈이, 자신의 아이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된다고 생각했다는 대목이, 나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하지만, 이스마엘이 정말 아브라함의 아들이라 ‘주장’할 수 있었을까. 이스마엘에게 아브라함을 ‘주인님’이 아니라 ‘아버지’라 부르도록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하갈은 오르막이거나 내리막, 영광이나 비참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평평하게,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58쪽) 분수를 모르지 않았고, 자기가 누구인지 잘 이해했다.(61쪽) 그랬던 그녀가, 가진 것이 없어 빼앗길 것도 없는 종 신분의 그녀가, 하지만 이 아들은 당신의 아들이에요,라고 말하는 대목이 의아했다. 나는 종이지만 이 애는 당신의 아들이에요, 나는 종이지만 이 아이는 당신의 적자에요. 이런 장면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아내의 신분으로 아브라함의 침실로 들어가라고 하갈을 떠밀었던 사라의 말이나, ‘하지만 저 아이도 내 아이요’라는 아브라함의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주변의 다른 주인들보다 나은 면이 있었겠지만, 딱 그 정도였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아들을 낳자마자 하갈을 괴롭히다가 결국 내치는 사라나, 사라의 요구대로 모자를 광야로 내쫓는 아브라함이나, 둘 다 똑같다. 믿을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사라의 종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을 하나님이 주목하셨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는 계획도 의도도 없었다. 사라의 등쌀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침실로 들어갔고 아이를 낳았지만, 그 모자를 끝내 지켜주지 못 했다. 아브라함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그런, 소심하고 용기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더 특별하다. 하나님이 무책임한 아브라함과 이기적인 사라로 인해 고통받는 사라의 종 하갈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다는 것. 그녀의 아들을 살려 주셨다는 것. 그들을 보살피셨다는 것.
주인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은 아들과 함께 광야에서 살았다. 아들은 광야에서 살면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 신이 그들을 보살폈다. (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