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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8월
평점 :
역사 서술에서 '팩트'는 규정하기 어려운 단어다. '일어난' 일에 대한 해석에 서술자의 판단이 개입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건의 '선택' 역시 서술자(만)의 것이므로 보여지는 것 너머를 '상상'해야 하는데, 과거에 대한 접근은 많은 에너지를 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팩트인가. 어떤 팩트를 '선택'할 것인가. 알아야 할 일과 몰라도 될 일. 기억해야 할 일과 잊어야 할 일. 감춰야 할 일(여당 입장에서 채상병이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과 밝혀져야 할 일(유가족 입장에서 채상병 사건과 관련된 외압).
『유대인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다. 따라 읽다보니 나는 그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일단은 내가 모르는 역사적 사건들이 주는 압박, 이를 테면 1648년 대재앙 같은 사건들.
1648년 늦은 봄, 마침내 우크라이나 농부들이 들고 일어났다. ... 툴친에서는 자기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폴란드군이 유대인을 코사크인에게 넘겨주었다. 테르노필에서는 성의 수비대가 유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바르에서는 요새가 무너져 모든 유대인이 몰살당했다. (447쪽)
유대인들이, 집단으로서의 유대인이 얼마나 일관되게 '박해받았는지'에 대한 확인의 과정이 내게는 무겁고 놀라웠다. 내가 모르는 역사적 사실들, 억압과 박해와 강제 이주, 살해 위협과 대량 학살의 엄중함이 나를 저자에게 바짝 붙어 있도록 만들었다. 나는 저자의 말을 완전 신뢰하기에 이르렀는데…
아, 마르크스. 마르크스에 대한 서술을 읽어가면서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되었으니, 마르크스 부분을 읽어가면서 저자 역시 인간이며(쩝, 당연한 사실을...), 인간이기에 특정 사안, 특정 인물에 대해 갖고 있을 법한 감정의 오묘함을 어렴픗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뒤쪽에서는 프로이트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는데, 가장 '유대인적인' 두 사람,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서술은 가히 대조적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적의('마르크스의 이론은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럴싸한 유대인의 미신에 불과하다', 591쪽)만큼 프로이트에 대한 호의('그는 인류에게 새로운 거울을 주었다', 704쪽)가 빨간색과 파란색처럼 강한 대비를 이룬다. 이쯤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저자 소개. 나는 그가 충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잊었었구나. '종교적으로 보수 성향의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해방신학을 이단으로 여기고 사제 독신주의를 옹호했으나 여성 사제 서품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던 폴 존스를. 기독교인이면서 빨갱이인 테일 이글턴, 그래서 더 소듕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다.
6부는 유대인의 전체 역사 가운데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홀로코스트, 반유대주의의 결정판과도 같은 비극의 역사를 다룬다. 프레모 레비의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나를 제일 놀라게 했던 바로 그 지점, 유대인들,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중의 많은 수가 스스로를 '독일인'이라 여겼던 그 지점을 폴 존스도 반복한다.
유대인은 독일을 고향처럼 생각했다. 독일은 학자들이 존경받는 사회이고 일부 가치관은 유대인 사회의 학자 지도 체제와 일치했다.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이 황금기에 유대인은 예쉬바에서 독일 대학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겼다. (683쪽)
그랬던 유대인들, 독일을 고향처럼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재산을 압수당하고, 출입이 제한되는 일련의 과정에 더해 급기야 이주를 '명령' 받는다.
유대인의 역사, 신학, 전통 문화, 사회, 구조,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까지도 타협하고, 값을 치르고, 애원하고, 항의하되 싸우지는 말라고 가르쳤다. (819쪽)
현재의 당면한 고난이 그들을 더욱 강하게 할 것이고, 이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공통의 신념, 지나한 과거로부터 선조들을 통해 얻은 경험은 '순순히' 독일 나치당의 요구에 응하도록 만들었다는 것, 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홀로코스트가 히틀러라는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의 기이한 행적으로 인한 비극이 아님을 수차례 반복한다.
실제로 학살을 자행한 것은 친위대이지만, 독일의 모든 부처와 군대, 산업계, 당이 무시무시한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가 라울 힐베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조직 간에 아주 완벽한 협력이 이루어져서 모든 조직이 한 몸을 이룬 거대한 기구처럼 학살 작전을 자행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832쪽)
히틀러 정부가 독일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탄성한 합법적인 정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한 모든 정치적 박해는 법에 의거한 '합법적'인 절차였다. 독일인들은 유대인 절멸에 대한 히틀러의 집념이 신앙에 가까운 정도였음을 알고 있었다. 구두로만 지시했다는 히틀러의 여러 명령들은 그의 충실한 부하들을 통해 전해졌고, '독일의 모든 부처와 군대, 산업계, 당', 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범죄에 가담했다.
1933년 아렌트는 정권을 장악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독일을 떠나 프라하에서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 곳에서 중동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시오니즘zionism 운동에 협력했다. 유대인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유대인으로서의 자기 존재의 의미, 유대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아렌트는 시오니즘 운동과는 차츰 거리를 두지만, 유대인을 처음으로 정치적 무대에 등장시켰다고 하여 시오니즘을 높이 평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렌트가 유대인의 민족적 기치를 내걸고 연합국에 협력하는 유대군 결성에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정치 활동을 중시했던 그녀의 사상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 18쪽)
1940년 6월, 프랑스가 항복하고, 독일이 파리를 점령했던 혼란의 시기에 아렌트는 기지를 발휘해 수용소에서 '걸어서' 탈출한다. 만약 그 때 머뭇거렸다면, 다른 판단을 했더라면 그녀는 독일군에 의해 다른 수용소로 이동했을 테고, 그랬다면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비슷한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그랬던 그녀가, '정체성의 정치'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사유하지 않음'으로 인한 비극적 결과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녀의 뜻, 의도를 정확하게,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자신의 민족이 처한 참혹한 역사 속에서도 그런 경지에까지 사고를 확장시킨것에 대해서는 무한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학교와 병원, 공터에서 축구하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구경하고 있는 부모에 대한 '의도적' 폭격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멸절, 팔레스타인의 절멸을 유대인들은 원하고 있다. 자신의 선조들의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주겠다는 결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두껍고 무거운 책을 무사히 마쳤다. 가자 지구의 폭격이 계속되는 한 피로 얼룩진 유대인의 역사는 멈춰지지 않는다. 가해자인 유대인들이 멈추지 않는 한, 저주의 시간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 지옥을 끝낼 사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들, 유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