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프로이트 콤플렉스』를 읽을 때는 프로이트에 대해 좀 넓은 마음을 갖게 되었더랬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고정된 정체성이라기 보다는 변화가능하다는 입장(103쪽)이나 성욕이 가진 종족 번식 이상의 의미를 주장(107쪽)했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케이트 밀렛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게 아니다. 프로이트에 대해 다시 뾰족해질 수 밖에 없다.
여성주의자들에게 단골로 공격받았던 남근 선망 이론. 반혁명기 페미니즘 반란에 이용되었던 가장 해롭고 파괴적인 무기인 남근 선망 이론은 결과적으로 남근을 결핍한 여성은 문명을 이룩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프로이트가 여성성의 세 가지 특징으로 꼽은 수동성과 마조히즘, 나르시시즘은 수동적인 여성만이 ‘정상’임을 강조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문단은 여기다. ‘여성성’과 ‘전통적 역할’에 대한 가부장제 환상이 종교를 통해 강화되었던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시대에는 그 역할을 과학이 맡았다는 주장. 새로운 시대의 스피커는 과학이었다. 객관성과 중립성이라는 옷을 입은 과학.
실제로 가부장제 사회 질서와 성 역할, 남성과 여성에 대한 기질적 차별화 등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종교에서 나오지 않았다. … 낡은 태도가 새롭게 정식화된 것은 과학, 특히 심리학과 사회학, 인류학과 같은 새로운 사회 과학에서부터였다. … 보수적 사회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혁명적 변화를 수행하는 데서 난처해하고 꺼리는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과학이라는 최신식 언어로 별개 영역이라는 낡은 원칙을 다시 포장해야 했다. 이들 중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프로이트는 의심의 여지없이 당대 성 정치학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강력한 반혁명적 힘이었다. (355쪽)
개론서일 뿐이지만 프로이트를 2권 읽고 나니, 소설의 몇몇 장면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의심했고, 또 한 편으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인데, 프로이트를 읽고 나서는 그 장면들이 새롭게 보인다. 이를 테면, 남자와 여자, 너와 나 사이의 가장 중요한 용무는 섹스뿐이라고 그렇게나 목놓아 부르짖던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꼭 필요한 매혹은 섹스뿐이야. 섹스를 제하고도 남자가 여자를 그렇게 매혹적이라고 생각할까? 섹스라는 용건이 없다면 어떤 사람이 어떤 다른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매혹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용건 없이 누구에게 그렇게 매혹될까? 불가능하지. (28쪽)
필립 로스는 프로이트주의자가 확실하다. 나 혼자 확신한다.
아니면, 『속죄』의 서재 scene. 소설가를 꿈꾸는 열 세살 소녀 브리오니는 조용한 서재 안쪽에서 언니 세실리아와 동네오빠 로비의 알 수 없는 행동을 목격한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 날 밤, 단편적인 사실과 상상력을 교묘히 조작해(알라딘 책소개) 로비에 대해 악의적으로 말하게 되고, 이 일 때문에 로비는 평생 동안 고통받게 된다. 부모 사이의 성교가 보편적으로 가-피학적으로 인식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브리오니는 언니와 동네오빠와의 정사 장면을 primal scene (원색 장면; 부모의 성교 장면에 대한 아동기 회상이나 환상)으로 인식한 것은 아닐까. 나 혼자 추측한다.
“And so the lion fell in love with the lamb…,” he murmured. I looked away, hiding my eyes as I thrilled to the word.
“What a stupid lamb,” I sighed.
“What a sick, masochistic lion.” (274쪽)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인이라서, 에드워드는 스스로를 마조히즘 사자라 칭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 고통을 선택하는 마조히즘 뱀파이어 사랑장인 에드워드. 두 사람 오래오래 행복하길. 나 혼자 흐뭇하다.
프로이트를 읽으며 소설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나 싶었는데, ‘이달의 인물’은 '푸코'라고 한다. 그렇다면 뭐, 나는 푸코에게 간다. 성큼성큼은 아니고 살금살금 간다. 살금살금 푸코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