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억압적인 가부장제 하에서는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핵심은 여성의 성 생활과 재생산 생활(reproductive life), 여성의 자아정체성, 자존심, 자아존중감에 대한 남성의 통제가 모든 억압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을 구성한다는 주장이다. (66쪽)
‘급진주의 자유의지론 페미니스트’와 ‘급진주의 문화 페미니스트’로 양분되는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포르노, 성매매, 재생산과 모성, 계약모와 레즈비어니즘에 대해 극명한 해석 차이를 보인다. 특히 안타까운 점이라면, 급진주의 자유의지론 페미니스트들과 일부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 비페미니스트 언론 자유 옹호자들이 캐서린 매키넌과 안드레아 드워킨의 반포르노 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연합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협공으로 미국 대법원은 미니애폴리스와 인디애나폴리스의 반포르노 조례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선포했다(85쪽). 포르노는 개인의 선택에 따른 표현의 자유로 인정받게 되었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러 가치 중에서 모성은 좀 떨어져서 보고 싶은 파트다. 워낙 모성이 부족한 사람이어서 그런 이야기가 더 불편할 수도 있고, 동서고금 희생의 아이콘 ‘어머니’라는 이름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급진주의 문화 페미니스트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남성 산부인과 의사들이 그들의 ‘철의 손(산과용 집게)’으로 산파들의 손(여성의 신체구조에 민감한 여성의 손)을 대체하며 여성 산파들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98쪽) 마녀사냥까지 되돌아가지 않더라도. 아니, 꼭 마녀사냥까지 돌아가야겠다. 마녀사냥을 통해 지혜롭고 유능한 산파들이 출산 현장에서 쫓겨나면서 출산은 전문가로 인식된 남자 의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게 되었고, 출산의 주체인 임신부 여성은 도마 위의 생선처럼 처치를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부른 배를 감싸 안고 무력하게 진료대 위에 누워있던 시간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똑같은 임신, 출산의 과정을 거쳤지만 대학병원에서의 몸과 여성전문병원에서의 몸은 전혀 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대리모와 임신모에 대해서도 두 진영은 다른 견해를 갖는다. 급진주의 문화 페미니스트들은 계약모 제도에 반대했는데, 경제적으로 부유한 여성과 부유하지 않은 여성간의 파괴적 분열과 유전자 제공자, 임신한 사람, 아이를 기르는 사람 간에 생기는 분열을 염려했다. 저자는 이를 『시녀 이야기』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급진주의 문화 페미니스트 마지 피어시는 공상과학소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에서 인공 재생산이 여성과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생물학적 단위로서의 가정이 제거된 유토피아를 꿈꿨다. 아이들을 공동체 전체의 귀중한 인간 자원으로 여기며, 세 명의 공동모(co-mothers,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 혹은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에 의해 양육되는 미래사회를 그렸다(95쪽). 아이들이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버지의 소유물로 인정되지 않는 세상. 육아를 공동체 전체의 임무라고 여기는 세상. 어머니,라는 이름이 덜 중요한 세상.
모성은 우리의 개인적, 정치적 결함, 다시 말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잘못된 일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떠맡은 희생양이며, 그 결함과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어머니에게 부여된 – 당연히 실현 불가능한 – 임무였다. 페미니스트들이 오랫동안 항의해왔듯이 우리는 어머니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요구한다. (『숭배와 혐오』, 6쪽)
아이의 개인적, 정치적 결함과 잘못에 대한 무한책임을 뜻하는 모성. 모성 그 자체를 상징하는 엄마로 불리는 내가, 이 모든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결국 완수하지 못할 임무임을 확인할 때 고통과 기쁨을 느낀다. 이는 나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며,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불러온다.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