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다락방님의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리뷰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이전에 읽다가 도중에 포기한 책이라서 더 관심이 갔다. 앞부분만 읽었지만, 하루키를 인터뷰했던 젊은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가 그의 왕팬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하루키의 작품을 오랫동안 깊이 있게 읽어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읽던 도중, 하루키 작품을 좀 더 읽은 후에 이 책을 읽으면 더 재미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반납일도 성큼성큼 다가오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읽은 하루키 소설은 『기사단장 죽이기』인데, 친하지 않은 옆집 아저씨에게 ‘제 가슴, 너무 작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이상한 여고생 설정 빼놓고는 재미있게 읽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 자체로서는 하루키의 능력에 대해 논쟁할 필요가 없는 듯하다. 다만 ‘성적인’ 암시나 섹스에 관한 표현 방식을 넘어서서, 남성 작가 하루키가 생각하는 ‘성적 모험’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
남녀의 성적인 관계, 육체적인 소통에 대해서 작가들이 각각 지향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도 있고, 싫어하는 방식도 있다.
20대의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했던 조정래의 서술은 지극히 남성적이다. 남성적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될 때의 의미 그대로다. 그의 작품들의 지향과 노고에 지극히 찬탄하고 존경하지만, 적어도 성적인 서술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수컷이 먹이인 암컷을 대하는 자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김훈도 마찬가지다. 나는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김훈을 읽을 때 불편했던 내 마음을 사실 그대로 말할 수 있게 됐다. 김훈이 페미니즘을 못된 사조라고 생각하는 이유, 그렇게 말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는 이유가 단박에 설명된다. 밥 먹는 일과 다름없는 일상으로서의 섹스. 역시 수컷의 섹스. 딱 그만큼이다. 필립 로스를 사랑하고, 그의 소설을 사랑하지만, 그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섹스에 관한 기나긴 묘사에 대해서는, 뭐랄까. 읽다 보면 중간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온다. 아이구, 참. 뭐, 또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사람 말했으니 이제 좋아하는 사람 차례다. 절판되었던 이언 맥큐언의 『속죄』는 <이동진의 빨간책방> 방송 이후 재출간되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방송에서 소설가 김중혁은 도서관 장면을 말하면서, 로맨스의 측면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혹 아직 안 읽어보신 분이 계시다면 직접 읽어 보시면 되겠다. 풋풋한 첫사랑의 난감함과 애절함, 그리고 폭주하는 기관차 같은 열정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낭떠러지. 한없이 낭만적인 낭떠러지에 다다를 수 있다.
잭 리처가 나오는 『어페어』 역시 좋아한다. 엄중한 상황 속에 꽃피는 사랑, 끊이지 않는 웃음의 대향연. 깊은 밤, 손을 잡고 같은 방으로 들어가는 것에 합의한 성인남녀가 얼마나 천천히 옷을 벗을 수 있는지. 이 책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겠다.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은 아름다운 소설이다. 처음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모두 다 한결같이 아름답다. 촉촉하고 부드럽다.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그리고 이 책 『나의 사촌 레이첼』.
422쪽에서부터 425쪽까지.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온 마음을 다 빼앗겼을 때,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어리석은 행동들과 미숙한 움직임이 얼마나 귀여운지 이 책은 보여준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지만, 영원히 마음에 남는 사랑의 흔적에 대해서 말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심장이 벌렁거리다 못해 뛰쳐나올 것 같은 순간. 영원히 나의 것인 바로 그 순간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