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하는 일은 본능적이고 도덕적인 일, 자연적이고 신이 부여하는 소명에 따라 행해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여성이 책임을 받아들이기 거부했을 때 그것은 본성에 배치되고 사악하다고 치부되었다. (37쪽)
눈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혹은 구별을 요구 받는 남성과 여성의 외연적 차이는 그들의 삶에 각각 다른 영향을 끼친다. 이제는 여자 가르쳐 무엇하느냐, 여자는 시집 잘 가는게 최고다,라는 무식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여성적인 것, 여성의 할일, 여성의 본성에 대한 강요와 강제는 엄연히 존재한다. 성범죄와 관련해 법률의 집행과 판단 과정에서 피해자의 95%이상인 여성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에 더해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 여성성에 대한 인식은 사회와 문화를 통해 전달, 확산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여성 스스로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를 낳는 일은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남성과 여성이 같이 해내야만 하고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는 않는 모성애의 발견으로 육아의 주체는 여성으로, 육아의 책임자는 여성으로만 인식된다. 워킹대디라는 단어 없이 워킹맘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이유다. 엄마이어야만 하는 여성이 일하는 경우, 일하겠다고 하는 경우에 그 여성은, 그 엄마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만다. 엄마인데 일하는 사람. (직업이) 엄마인데 일까지 하겠다고 하는 사람.
여성은 대부분 비서, 교사, 보육사, 간호사 등 몇몇 여성 직종에 몰려 있다. 불행히도 그런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이 많을수록 모든 조건이 같을 때 임금도 더 낮아진다. 그런 경향은 여성이 임금이 높은 남성 직종에 들어가지 못하는 규제와 함께 진전되었고 여성들은 몇몇 직종에 몰려들었다. 그러한 규제는 오늘날 많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여성 직종‘이라고 불리는 분야로 들어가고 있다. (82쪽)
이에 더해 여성은 남성보다 더 이타적이라는 관념, 19세기에는 강박으로 변화(41쪽)된 그 관념은 더더욱 여성을 돌봄의 영역으로 한정 짓는다. 의료, 교육, 보육, 노인간병 등의 돌봄 노동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여성이다.
몇몇 방문 보육과 어린이집은 양질의 보육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곳도 많다. 보통 돌봄 노동자들은 주차원보다도 보수가 적다. 규제의 부족은 상대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력을 보육 산업으로 끌어들이고 있는데, 유색인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19개 주에서만 교사의 직업 훈련을 요구하고 있다. 방문 보육에 대해서 훈련 자격을 공시하고 있는 주는 별로 없다. 일반적으로 미용사가 훨씬 더 엄밀한 자격 기준을 충족하도록 요구받는다. 절반 이하의 보육 노동자만이 본인을 위한 건강 보험 혜택을 받고 있고 부양가족에게 보험을 제공하는 경우는 훨씬 드물다. 이직률은 대도시 대부분에서 일 년에 30%가 훌쩍 넘는다. 아이들이 들락날락하는 보육 교사를 신뢰하기란 힘든 일이다. (103쪽)
나는 우리 모두가 답을 알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한 엄마가 3개월간의 출산휴가, 혹은 6개월간의 출산휴가를 마치고 다음달에는 직장에 복귀해야 한다. 엄마찬스, 시어머니 찬스를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 백일 된 아이 혹은 6개월된 아이, 이 예쁜 아이를 어딘가에 맡겨두고 직장에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 예쁜 아이를 돌봐 주실 어린이집 선생님이 하루 종일 맡아야 할 아이가 15명이나 되고, 그 아이들은 엄마 한 명이 돌보기에도 벅찬 에너자이저에, 화장실 갈 때 같이 가줘야 하는 아이들이고, 게다가 이 어린이집 선생님은 임시직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의 적은 급여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이 선생님이 사랑과 애정으로 내 예쁜 아이를 돌봐 주실 거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린이집 선생님 근무 환경 개선, 어린이집 선생님 급여 보조, 어린이집 선생님 수 확대 말고, 이 세상 하나뿐인 이 예쁜 아이의 돌봄 환경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언제까지 모른 척 하겠다는 말인가.
학교 절친 후배는 동대문구에서 작은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원장님~~ 하고 부를 때마다, 언니~~~!!! 하면서 진심으로 싫어(?)하는데, 가끔 만나면 어린이집 운영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곤 한다. 그 어린이집은 ‘한살림’ 식재료를 사용해 아이들 급식을 운영한다. 아이들 간식도 ‘한살림’ 핫도그다. 선생님들의 쉬는 시간, 퇴근 시간이 정확하고, 보수도 선생님들 입장에서 챙기다 보니, 근처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가고 싶어 하는 1순위 어린이집이 됐다. 문제가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특별한 관찰이 필요한 아이를 조기에 발견해서 아이 부모와 상담하고 더 전문화된 기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준다. 경증 장애 아동이 한 명 있는데, 주위의 어린이집에서 모두 거절당해 2년째 이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이 아이를 돌보는 데 한 명의 전담 선생님이 필요하다. 그 모든 걸 다 감당하고 있다. 이 원장님 한 명이. 자신의 믿음과 소신에 따라.
언제까지 이렇게 헌신적인 교사, 헌신적인 원장에만 기대야 하는가. 언제까지 그녀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기대야 하는가. 언제까지 돌봄의 영역을 개인에게만, 이타적이고 양보를 잘 하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 여성에게만 기댈 것인가. 언제까지, 언제까지 모른 척 하겠다는 말인가.